헤어질 결심

by 한그루

그렇게 보기 좋게 면접을 말아먹었다.


그렇다고 호텔 방에서 멍하니

남은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여기는 홍콩, 일단 최저 예산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급하게 인터넷을 뒤져보니 많은 사람들이

빅토리아 피크 타워와 스카이 테라스를 추천했다.

전망대에서 보는 도시와 빅토리아 하버가

낮에도 멋있지만,

일몰 후 야경은 정말 인상적이라고.


'그래, 오늘은 빅토리아 피크다. 가자.'


오전부터 트램을 타고 올라가

밤까지 버티다 야경을 보고 돌아온다.

그게 오늘의 유일한 계획이자 목표였다.


다행히 날씨는 맑았고

바람도 기분 좋게 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홍콩은 정말 멋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올 만했어.'


일단 돈이 없으니

끼니는 마실 걸로 대충 해결하고

밥은 쿨하게 생략했다.

주변 샵들을 둘러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런데..


점점 해가 저물어가다가

갑자기 우중충해지더니

안개가 빌딩 숲을 완전히 가렸다.

그리고 마치 하늘 문이 열린 듯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진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야경은 이게 아닌데.

마치 이 상황이 꼭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나의 미래 같아서

갑자기 너무 서러워 눈물이 났다.


면접도 처참하게 떨어지고

돈은 돈대로 쓰고

음료수 하나 먹으며

겨우 야경 하나 보려고 여태 기다렸는데

이것마저 못 보게 하면 어떡하냐고.

난 왜 이렇게 하나도 되는 게 없냐고.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흐느끼며 울었다.


"삐비빅! 삐비빅!"


그 순간 호루라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았다.

바람이 많이 부니 밖에 있지 말고 들어오라 한다.


'아저씨.. 저 뛰어내리려는 거 아니에요.

그냥 좀 울게라도 해주세요.‘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실내로 들어와 비를 피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시 전망대로 나가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따라 나가보니

거짓말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반짝이는 홍콩 시내가 서서히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하루 종일 방황하던 나에게,


'많이 기다렸지?

늦었지만 홍콩에 온 것을 환영해,

언젠가 기회가 조금 다른 모습으로 온다 해도

너만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한눈에 알아보고 잡을 수 있어.

성공해서 다음에 꼭 다시 와! 기다리고 있을게 ‘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빅토리아 피크에서의 드라마틱한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트램을 기다리는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또 너야? 이젠 피할 곳도 없다. 그냥 맞자’


그러다 한국 관광객 단체 무리 사이에 끼게 되었다.

내 고향, 부산에서 오신 분들이셨다.

사투리가 부산 맞다.


비를 맞고 있는 나에게

한 아주머니가 조용히 우산을 씌워주셨다.


"아! 감사합니다."

갑자기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시며,

"어머나, 우리나라 아가씨가?

아이고 예뻐라. 반가워요."

하며 주변 분들께

여기 한국 아가씨가 있다고 엄청 반가워하셨다.

아주머니 일행이 물어보셨다.

"아가씨도 야경 보고 오는 길인가 보네?

너무 예쁘지요? 근데 왜 여기 혼자 왔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아, 면접 보러 왔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아주머니가 또 한 번 놀라시며 말했다.

"어머나,

한국에서 여기까지 면접을 보러 왔어요?

엄마, 아버지가 엄청 자랑스러워하시겠네.

아이고 장하다, 우리 아가씨."


무슨 면접을 봤는지,

결과가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분들에게는 젊은 아가씨가 용기 내서

자기 인생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보겠다고

낯선 땅에 발을 디딘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문득 우리 부모님 생각이 났다.

우리 부모님께 나는

홍콩의 야경보다도 더 특별하고 예쁜 딸인데,

내가 이렇게 혼자 와서

속상해하고 울고 있는 걸 아시면

얼마나 가슴 아프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는 길, 나는 결심했다.


해외 사업부든 승무원이든 뭐든

살아남으려면 일단 영어를 해야 한다.


가자. 어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