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수박주스요?

by 한그루

[퇴사 6주 전]


유학원을 찾았다.

종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곳으로 갔다.


나의 상황은 이랬다.


영어 회화는 눈치껏

대답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문법 기초가 전혀 없었다.

체류 기간은 1년 정도를 예상했고,

돈도 함께 버는 게 이상적이었다.

그리고 어딜 가더라도 영어를 가르칠 수준정도는 된다고 증명하기 위해

테솔(TESOL) 자격증을 따는 게 목표였다.


유학원 실장님이 추천한 루트는 이랬다.

- 필리핀 스파르타식 기숙 어학원 2개월

-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1년 체류하며 8주 테솔 디플로마 과정 이수


그럴싸했다.


번듯한 회사는 다녔지만

젊은 나이에 남들 하는 건

또 다 해야 할 것 같았고,

고약한 소비 습관 덕에 모아놓은 돈은 없었다.


하지만

퇴직금으로 저 일정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래,

진짜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가자!'


그렇게 회사로 돌아와

퇴사 면담을 신청했다.




며칠 후,

그 폭풍 같던 퇴사 면담이 끝나고

마지막 근무일까지 정해졌다.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내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자리에 앉아 있던 언니들이 차례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나가서 커피도 사주고,

주스도 사주고,

편의점으로 데려가서

"먹고 싶은 거 다 골라"라며

플렉스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두고

떠날 생각을 하다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교육팀에 지원했을 때 첫 면접관이자

충분히 증명되지 않은 나에게

처음으로 기회를 주셨던

교육팀 팀장이셨던 분이 나를 보러 오셨다.


"미송아! 나가자,

너한테 꼭 사주고 싶은 게 있어."


그때 내가 일했던 가산디지털단지에는

구석구석 테이크아웃 카페가 참 많았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카페에

나를 데려가시더니,

종업원에게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녕하세요. 저희 수박 주스 두 개 주세요."


'네? 수박 주스라고요?'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일단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수박을 반통 가까이

흡입하듯 먹어는 봤어도

수박을 주스로 먹어본 적은 없어서

말만 들어도 이상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수박 주스가 나왔다. 윽...

그걸 받아 들고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데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암말 말고 일단 마셔봐."


두려움 속에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순간,

입안을 가득 채우는 시원함과

생각지도 못한 청량감.

그리고 빌딩숲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까지.

떠날 날 얼마 남겨두지도 않고

난 왜 이제야 이 맛을 본 거야.

정말 억울한 만큼 완벽했다.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이거 너무 시원하고 맛있지 않니?

뭔가 이상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놀랐어.


용기 내는 게 어려웠을 텐데,

난 너의 새로운 시작이

꼭 이 수박 주스 같을 거라 생각해.

앞으로 네가 어떤 도전을 하든

너는 잘할 거야.


전에 여기 와서 이걸 마시는데

미송이 네 생각이 나서

네가 가기 전에

꼭 이 맛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렇다.

일단 퇴사하겠다고 당차게 얘기했지만,

사실 회사 밖이 진짜 낭떠러지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설령 막다른 길을 만나

조금 돌아가야 하더라도

나는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팀장님과 오랜만에 옛 추억을 떠올리며

수박 주스를 들고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빌딩숲 사이로 불어오는

초여름의 청량한 바람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제 정말,

퇴사일이 점점 가까워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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