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란 말 대신

by 한그루


시드니에 도착해,

6인 도미토리 숙소에 체크인하고

곧장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와...”

잔잔한 바다 위에

고요하게 떠 있는 오페라 하우스.


‘말로만 듣던, 바로 너구나.’


숙소 루프탑에서 보였던 오페라 하우스




나는 친구들과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중동 항공사 면접은

한번 가보기로 결심했다.


나에겐 이미 떠날 곳이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시드니까지 왔는데,

이 거짓말 같은 타이밍에 보게 된 채용 소식을

무시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렇게 브리즈번 오픈데이에서 만나 알고 지내게 된

친구들을 시드니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9월 24일 아침.

우리는 면접이 열리는 시드니의 한 호텔에 모였다.


로비에는 단정한 정장 차림의 지원자들이 모여 있었다.
완벽한 메이크업, 또렷한 눈빛,
그리고 애써 감춘 긴장.


웬일인지,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농담을 건네며
먼저 말을 건넬 여유까지 생겼다.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면접관 아만다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했다.

CV 드롭 - 토론 - 영어 시험 - 최종 면접


'난 이번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곧이어 CV 드롭이 시작됐다.


"Good morning. Nice to meet you."


몇 가지 스몰토크가 오갔고,

아만다는 나를 약 2초간 바라봤다.

그리고 내 이력서 상단에 무언가 표시했다.


'나에게 다음 일정이 적힌 쪽지를 건네줄까?'


손에 땀이 났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Thank you for coming.

We will review your CV and get back to you by this afternoon."

"참석해 줘서 고마워요. 이력서 검토 후에 오늘 안엔 연락드릴게요."


처음이었다면 몰랐을 텐데,

듣는 순간 알았다.
저 말의 의미는 탈락이라는 것을.


하지만 끝까지 프로페셔널하게.


"Thank you. I hope you have a great day!"


두 번 없을 환한 미소로 감사함을 전하고

멋지게 돌아섰다.


신기하게도 아쉬운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후련했다.

만약 오늘 참석하지 않았다면 찝찝한 마음으로 호주를 떠났을 수도 있었을 텐데.

꼭 해봐야 할 일을 이제는 해봤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친구들도 다음 인터뷰 초대를 받지 못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이고.. 어떡해..”

그럼 뭐, 놀아야지!


우리는 떨어질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챙겨 온 옷으로 갈아입고 곧장 시내로 나갔다.


그날부터 우리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함께 다니며 시드니를 누볐다.

달링 하버에서 불꽃놀이를 보고
하루에 한 번은 꼭 오페라 하우스에 가서 바람도 쐬고,

하버브릿지가 잘 보이는 루나파크도 가고,

페리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도 하고

기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기도 하고,

우리 셋을 꼭 닮은

Three sisters라는 바위봉에 하이킹도 가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비로소 나에게 찾아온 진짜 홀리데이.


그 중동 항공사는 나에게 일자리를 주진 않았다.

대신, 호주에서 가장 빛나는 한 주를 선물했다.

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친구들도

대신 초대해 주었으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야지.


상상이나 했을까

혼자였다면

또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청승맞게 보냈을지

나는 호주에 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9월 28일 저녁.

드디어 이곳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이다.

서늘해진 날씨.

꼭 내가 브리즈번 공항에 내렸을 때의 그 날씨였다.

그렇게 폭풍 같았던 1년이 지나

다시 이 계절이 되었을 때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는구나.


달링 하버를 따라 끝도 없이 걷다가

오페라 하우스 아래,

바다 가까운 곳에 누웠다.

밤하늘과 뽀얀 조개껍데기를 닮은

오페라 하우스를 번갈아 보며

잔잔한 바닷소리를 들었다.


‘퇴사하고 호주에 오길 참 잘했다.’


처음으로 직면해 보는 온실밖의 세상들.

외롭고 고단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지만
참 감사하게도 힘들 때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위기를 극복하며 이 여정을 완주할 수 있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었던 시간들.


나의 시드니 '쓰리 시스터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시드니 공항에서

내 고향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갑자기 창문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도 나처럼 울고 있는 거야?'


그렇게 비행기가 이륙했다.


창밖으로

자꾸만 멀어져 가는 시드니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왜였을까.

이대로 가면 아주 오랫동안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이제야 실감이 났다.
나는 진정 이곳을 떠나는구나.


아주 오래 보지 못하더라도,

기억할게.

내가 가장 나일 수 있게 해 준 너를.


안녕이라는 말 대신,
잊지 않겠다고 할게.


우리, 훗날 또 만나.





이번 시즌의 마지막화가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일요일에 발행될 에필로그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눠보려 합니다.

브런치에 첫 글을 올린 지 어느덧 한 달 반, 그리고 처음으로 20화 브런치북을 연재해 보았습니다.

응원해 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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