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Vol. 180 '안녕, 자존감' 中
대부분의 부모들이 예행연습 없이 육아라는 실전에 투입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상관없이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겪게 되고 자존감에도 상처를 입곤 한다.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은 고되고 힘들기만 한 걸까, 왜 노력할수록 힘들어지는 걸까. 전문가가 아닌 스스로에게서 해답을 찾는 부모들, 스스로 부모학교 3기 도담도담 팀을 만나 부모의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에디터 한순호 포토그래퍼 강봉형 장소 협찬 커피하우스 반달
자존감의
스위치를 켜다
스스로 부모학교 3기 도담도담 팀을 만난 것은 햇볕이 따스한 늦은 오전, 장위동에 위치한 어느 카페였다. 10월부터 8주간, 매주 금요일마다 진행됐던 스스로 부모학교가 마무리되고 1주만에 모이는 자리였다. 이날 모인 5명의 부모들은 따뜻한 차와 음식을 나누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레 아이 얘기,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후 손민경 씨가 감정카드와 포스트잇 등을 꺼내놓자 익숙한 듯 뭔가를 그리고 쓴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보통의 티타임과 비슷하면서도 약간은 특별해 보이는 이들 모임은 ‘스스로 부모학교’다. 자람가족학교와 이지웰가족복지재단이 지원하는 ‘스스로 부모학교’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나누고 상호 멘토링을 하는 자발적인 부모 모임이다. 5~9명으로 팀을 구성해 지원하면 리더 교육과 교육자료, 멘토링 등을 제공하는데, 스스로 부모학교 3기로 선발된 총 17팀 중 하나가 도담도담 팀이었다. 리더인 손민경 씨의 제안으로 모임을 결성하게 됐다고.
처음에는 ‘단톡방’에 공지로, 그 이후에는 개인적인 설득과 회유(?)로 모인 이들이 총 8명. 손민경(토끼엄마), 김인순(꽃잎), 김혜성(별이), 안혜선(카일리), 이윤주(둥이맘), 김미숙(김미김미), 양정심(홀딱깬다), 박진성(대롱별) 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팀원들은 처음부터 이 모임에 특별한 기대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시작된 모임, 그러나 첫 모임부터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육아서도 많이 읽고, 강의도 들으러 다녔어요. 그런데 삶은 계속 힘들고, 왜 힘든지 이유를 모르겠는 거예요. 그런데 첫 모임 때 내 안에 완벽주의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가족이나 아이와 상관없이, 나만의 이상적인 부모의 기준을 세워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애썼던 거죠. 그런 것이 내 마음속에 존재한다 걸 알고, 그걸 깨뜨리는 것 자체가 획기적이었어요.”
김인순 씨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손민경 씨가 말을 잇는다. “스스로 부모학교에서는 모든 부모들은 이미 충분히 좋은 부모가 될 자질, ‘부모성’을 갖고 있다고 말해요. 스스로 부모학교 프로그램은 거기에 스위치를 켠 것뿐이라고요. 그 말 한마디에 자존감이 딱 올라가는 거예요(웃음). 그전에는 제가 못난 부모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원래 괜찮은 사람인데, 방법까지 알았으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거라는 말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됐어요. 그 말이 이 모임을 통해 함께 나누고 싶은 결정적 한마디인 것 같아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양육 스트레스, 관계 설정, 부모 네비게이션…. 매 시간마다 주제는 조금씩 달랐지만 관통하는 핵심이 있었다. 바로 나를 마주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 현재 나의 숨은 마음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일도 생겼다. 말을 떼자마자 눈물이 뚝뚝 떨어져 처음에는 민망하기도 했지만, 잊고 있었던 기억을 꺼내며 느낀 감정들과 눈물을 흘린 후에 느끼는 후련함은 감동으로 바뀌었다. 모임이 거듭될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부모들은 자기 자신을 조금씩 발견하게 됐고, 그만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어린 시절에 내가 사랑 받았던 기억을 그려보라고 하는데, 아무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스스로 부모학교 3기 과정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순간이었어요. 그래도 하나 기억이 났는데, 아빠한테 굉장히 심하게 맞은 후 아빠가 연고를 발라줬던 순간이었어요. 울컥했죠.”
김인순 씨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엄마 없이 두 팔과 한 다리가 없는 아빠를 돌봐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계속 다그쳤고, 나중에는 감정이 완전히 무감각해졌다고. 다행히 20대 때 좋아하는 일을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감정이 많이 편안해졌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 어릴 적 상처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감정을 포장할 수 있는데 아이 앞에서는 포장이 안 되고 고스란히 다 나오는 거예요.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니까 육아서고 뭐고 다 소용이 없더라고요.”
전문가의 치료도 아니고, 단지 나를 지지해주는 이들과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과연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혹자는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부모학교에서 부모들은 인생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나누고 공감하며, 어릴 적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는 마법 같은 일을 함께 경험했다. 김인숙 씨가 ‘스스로 부모학교는 내면 여행’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다 이어지는 것 같아요. 과거의 나를 통해서 지금의 나를 보는 거죠. 부모가 우리를 사랑했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러서 사랑을 받았다고 느낀 경험이 별로 없다면, 내가 못나거나 성격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경험이 없어서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거예요. 그걸 아는 것만으로 일단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더라고요.”
나의 자존감이
가족의 자존감으로
스스로 부모학교를 통해 변한 건 나 하나가 아니었다. 아이를 비롯해 가족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를 보는 관점이 바뀌니,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관점이 달라지니 관계가 달라졌다.
“가족이라고 가치관이 다 같을 수는 없는데 지금까지 남편도 나처럼, 아이도 나처럼 하길 바랐더라고요. ‘남편은 남편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살도록 놔두자, 존중하자’란 마음이 스스로 부모학교 이후 생겼어요. 물론 지금도 버럭할 때도 있고, 들쑥날쑥하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 부모학교를 시작하고 3주쯤 지났을까. ‘남편의 모습이 측은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출근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힘들겠다’ 등의 내용이었다. 아이들과의 관계에 신경을 쓰다 보면 남편은 잊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 그래서 ‘남편과의 관계 끌어당기기’를 해보기도 했다고.
“보통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관심 끌기는 선물을 주는 등의 긍정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반면 부부 사이의 관심 끌기는 울음이나 상처 주는 말 등 부정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고요. 숨은 마음과 행동 대신 건강한 마음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안 이후에는 각자 집에 돌아가 이를 실천하려 애썼고, 나름 효과가 있었어요.”
아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부모학교를 통해 공감하기가 자연스러워지자 아이들과의 대화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아이의 좋은 반응은 당연하게 여기고, 부정적인 반응에만 짜증을 냈던 모습도 차츰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그저 당연하게 지나칠 일들도 조금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손민경 씨.
“우리는 이런 대화법에 있어서는 무경험자잖아요. 그런데 우리의 노력을 통해 우리 아이들은 유경험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제 노력 하나하나가 너무 의미가 있고 소중해요.”
물론 지금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잘 버텨온 나를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 앞으로도 잘해나갈 거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이미 아이, 가족을 향한 믿음으로 자라고 있었다. 건강하게 뿌리내린 자존감은 내 아이를 기다려주는 힘이 되고, 결국 아이의 자존감으로 꽃피지 않을까.
자존감은 결국
나에 대한 믿음
“한 달의 한 번이라도 모임을 이어가고 싶어요. 지금은 부모 교육 품앗이지만 앞으로는 육아 품앗이 형태로 이어갈 수도 있을 것 같고요.”
8주에 걸친 스스로 부모학교는 끝이 났지만 앞으로도 지속하자는 의견이 많아 모임은 이어질 예정이다.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않는 대신 서로 지지해주고 공감해줄 옆의 누군가가 계속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가치관과 육아관을 가진 부모들의 모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역시 ‘인간관계’다.
“전에도 몇 번 모임을 만들어 본 적이 있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모임 첫 날에 그룹 룰을 정했어요. 1. 시간 약속 잘 지키기, 2.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기, 3. 틀린 건 없고, 다를 뿐, 4. 비밀 유지 이렇게 네 가지요.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워요. 그래서 훈련도 필요하고요.”
손민경 씨는 자존감이 떨어지는 큰 요인 중 하나로 서로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분위기를 꼽는다. 이런 잣대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려면 무엇보다 자기 주관이 중요하다고. 또 하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열린 마음이다.
“만약 자꾸 자존감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진다면 우선 집에서 나와야 할 거 같아요. 집에 아이와 단둘이 있으면 빠져드는 우울함이 있거든요. 거기에 익숙해지면 부정적 감정에 대한 감각도 무뎌져요. 첫발은 결국 자기가 움직여야 해요. 처음이 힘들겠지만 그 한 걸음을 떼면 손잡아주는 사람도 생기고, 길도 보여요.”
김혜성 씨는 아이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엄마, 아빠도 아닌 너야’라고 이야기하듯이, 나 그리고 배우자에게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이야기를 신랑에게도 많이 해요. 물론 저 스스로를 아끼려고 노력하고요. 결국 자존감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니까요.”
스스로 부모학교를 마친 부모들은 전보다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고 한다. 늘 부족하고 못난 것처럼 느껴졌던 내가 사실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발견, 다른 누군가에 기대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나를 위로하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깨달음. 이러한 발견과 깨달음이야말로 자존감의 씨앗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