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Vol.181 '나도 사회인!'
ESSAY
글 이고은 에디터 박은아
내 나이 서른일곱, 이 나이가 되어도 친구 사귀는 데 에너지를 쏟게 될 줄은 몰랐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180도로 달라질 줄은….
아이를 낳기 전 기자 생활을 할 때는 공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각종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언론,정치계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어울렸고, 사적으로는 인생 상담을 할 수 있는 오랜 친구들을 주로 만났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가 앞으로도 이어져 나갈 것을 별로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내 일상의 90% 이상은 아이들이 점령해버렸고, 그로 인해 내 삶은 이전 인간관계가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변했다. 사회생활을 할 때 알게 된 지인들을 만난답시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간 이야기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뻔히 알기에 더 이상 만날 수도, 만날 일도 없게 됐다. 절친이라도 미혼이면 공감대를 형성할 소재가 부족해서, 먼 곳에 사는 친구는 물리적으로 오고 가기가 어려워 만나지 못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커녕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다.
결국 엄마가 된 후, 내 인간관계의 틀은 ‘엄마’라는 이름 아래 완전히 재편됐다. 예전엔 그리 가깝지 않던 사이였어도 ‘물리적으로 자주 만날 수 있는 아이 엄마(혹은 아빠)’면 자연스레 친한 사이로 발전했다. 아이를 데리고 만날 편한 장소를 찾다 보니 서로의 집을 오가는 친구가 됐고, 아이를 키우는 생활 전반을 공유하면서 사생활도 서슴없이 나누었다.
인간, 그리고 관계에 대한 내 부족한 통찰력에 대해서도 깨달았다. 고백하자면 싱글이던 시절 가장 한심하게 여겼던 사람이 인터넷 카페에서 ‘친구 찾는다’며 글을 올리는 엄마들이었다. 얼마나 인간관계가 엉망인 ‘찌질’한 사람이면 인터넷에서까지 친구를 찾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두 아이를 낳고 기르는 지금은 나의 무지몽매함과 오만함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 엄마들이 얼마나 외로우며 사람이 절실하게 그리운지 너무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2년 전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서 나는 한동안 외딴섬처럼 살았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 몇 달간 오로지 아이들과 하루 종일 씨름하는 일상만을 반복했다. 내가 물리적으로 만날 수 있는 ‘두 아이를 달고 만날 수 있는 근거리에 사는 엄마 사람’이 없으니 그저 외롭고 쓸쓸한 육아 생활만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그러다 어느새 나 역시 인터넷으로 친구를 찾는 사람이 돼 있었다. 둘째 아이가 백일을 넘긴 후, 아파트 주민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게 된 2015년생 아이 엄마들과 함께하는 ‘정모’에 참가한 것이다. 어찌나 사람이 그리웠는지,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도 다들 십년지기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좋아했다. 그저 같은 또래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마들은 대동단결했다. 각자의 육아에 대해 안부를 묻고, 조언을 주고받고, 응원을 하는 일은 서로에게 엄청난 위안이었다.
첫째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의 같은 반 엄마들과도 가까운 사이가 됐다. 회사를 다닐 때만 해도 내 아이를 신경 쓰는 데만 바빴지, 다른 아이들이나 그 부모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또래 아이들도 내 아이처럼 사랑스럽고 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에게도 관심과 애정이 샘솟았다. 이제는 서로의 집에 모여 함께 식사도 하고, 아이들 옷이나 물건을 물려주고 받는 돈독한 관계로 발전했다.
각박하고 바삐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엄마들은 그렇게 친구를 만들고 사람 냄새를 맡으며 살아간다. 엄마가 돼 감사한 일 중 하나는 관계에 대해 또 다른 차원의 경험과 성찰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병 때문인지 세상일에 대체로 비판적이고 냉소적이던 나에게도 곁의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건강한 마음이 싹튼다.
한편으론 우리 사회가 엄마들의 인생을 별로 배려하지 않는 곳이어서 ‘엄마 노릇’하기가 힘들다 보니, 반대급부로 엄마들 간의 ‘동지애’가 더욱 끈끈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든다. 부디 바라건대, 세상살이를 한탄하며 엄마들의 우정이 돈독해지는 일은 그만해도 되는 세상이 오길 소망해본다.
이고은
전직 신문기자이며 현재 두 아이의 엄마다. 경향신문 정치사회부 등에서 10년간 기자로 일했고, 온라인 저널리즘에 관한 책 <잃어버린 저널리즘을 찾습니다>를 집필했다. 퇴사 후 엄마의 시각으로 써온 글들을 다듬어 사회적 에세이집 <요즘 엄마들>을 펴냈다. 현재 브런치와 경향신문 블로그에 간간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