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Vol.182 '행복하게, 슬로 육아'
아이들과의 여행이라고 하면 산과 바다 혹은 섬, 상상력을 심어주는 박물관이나 놀이동산 등을 생각한다. 진중하게 이야기 나눌 틈도 없이 이곳저곳 발 도장 찍느라 금세 지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나의 어린 시절이 담긴 앨범을 들춰보다가 훌쩍 떠나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엄마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공간으로….
글 박헤나 에디터 윤경민 포토그래퍼 유재철
엄마의 초등학교에 가다
시작은 물려받은 그림책이었다. 무려 네 상자의 그림책을 시누에게 물려받아 차에 싣고 온 날, 쌍둥이는 여러 전집 가운데서 조금 예스러운 그림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엄마, 읽어 주세요.”
제목은 <오래된 골목>. 사방치기를 하는 아이들 모습이 그려진 표지를 보니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꼬불꼬불 좁다란 길을 따라 걷다가 층계를 열 개쯤 올라가서 또다시 골목을 걸어야 집이 나오는 성북동 골목길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이었다. 골목길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며 불렀던 노래를 불러주자 아이들 눈이 금세 동그래졌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엄마, 엄마도 골목에서 놀았어요?”
“그럼. 골목에서 외삼촌과 이모까지 삼 남매가 해가 질 때까지 뛰어놀았지.”
“엄마랑 외삼촌이랑 이모 아가 때 모습 보고 싶다.”
엄마는 날 때부터 엄마인 줄 알던 쌍둥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너희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귀엽고 예뻤어. 다음에 외가에 가면 앨범을 찾아서 보여줄게.”
며칠 뒤 외가의 안방 장롱을 뒤져 여러 권의 앨범 가운데서도 가장 낡은 앨범 한 권을 찾아냈다.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첫돌 사진, 세 살 무렵 엄마 손을 잡고 남동생과 함께 걷는 모습,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 여섯 살 무렵 교회학교에서 어린이대공원에 놀러가 찍은 단체 사진 등.
“엄마, 팬티 보여요!” “엄마, 지금 코 파는 거예요?” “이 총 누구 거예요?” “엄마, 귀여워요.”
쌍둥이는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던 끝에, 꽃다발을 손에 든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을 보더니 괴성을 질렀다.
“이야! 우리 엄마, 상 탔다!!! 엄마, 무슨 상 탔어요? 대상 탔어요? 대상?”
“아니… 엄마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이야.”
아침마다 늦잠 자느라 어린이집에서 지각대장은 맡아놓았으면서도, 늘 “초등학교 가고 싶어!”하고 외치던 쌍둥이의 귀가 번쩍 트였다. 결국 우리는 그날로 내가 어린 시절 다니던 방배초등학교로 향했다.
학교 앞은 1980년대에 비해 많이 변해 있었다. 나지막한 2층 주택이 있던 자리에 어느새 빌라가 가득 들어섰다. 학교도 많이 변했다. 옛 정문 자리 쪽에 체육관을 지으면서 정문 위치가 달라졌다. 그래도 붉은 벽돌로 지은 ㄱ자 모양의 학교 건물은 정겨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모래가 깔린 운동장에 서자 아이들은 발에 모터가 달린 듯 뛰기 시작했다.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뛰고 또 뛰어다니더니, 어디선가 야구공을 주워 와 던지고 논다. 가을 운동회가 열리면 반별로 앉아 있던 스탠드에도 앉아 보고,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정글짐에도 올라가 본다.
운동장 고운 모래 위에 사방치기를 그려 콩콩콩 뛰어놀다가, 큰아이가 어느새 쪼그리고 앉아 넓은 운동장을 스케치북 삼고 나뭇가지를 연필 삼아 그림을 그린다. 작은아이는 흙장난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집에서 모래놀이를 하려면 좁은 욕실에 돗자리를 깔고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여기서는 모래를 들고 뛰어다녀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이 났다.
“엄마, 흙은 왜 부드러워요?”
“가루니까. 가루는 부드럽잖아. 밀가루 만져 보면 부드럽지?”
“네, 부드러워요.”
“그런데 흙가루에 물을 넣고 조물조물 뭉치면 무엇이 될까?”
“피자요!”
“반죽이요!”
“방귀요!”
아이들의 대답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골목길, 그 속에 엄마가 있다
“학교 앞에 있던 문방구들이 다 없어졌네. 딱따구리 문방구도, 다람쥐 문방구도. 엄마가 늘 준비물을 사곤 했던 곳인데….”
아침이면 아이들이 문방구 앞에 줄을 서서 준비물을 사던 풍경은 이제 사라졌다. 1980년대에 비하면 학생 수가 3분의 1로 줄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아침반, 오후반이 있을 정도로 학생 수가 많았다. 지금은 전교생 1200명. 한 학년에 200명 남짓밖에 안 된다. 학생 수가 줄면서 문방구도 차례로 문을 닫았다.
유일하게 남은 중앙문구 앞에서 아이들은 장난감 뽑기를 하느라 신이 났다.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을 살피던 큰아이의 눈이 옥빛 구슬에 머문다.
“엄마, 이거 뭐예요? 개구리 알 같아요.”
“아, 이건 구슬이라는 거야. 엄마, 아빠 어린 시절엔 이걸로 구슬치기하면서 놀았어.”
아이는 구슬을 두 묶음이나 사서는 부자가 된 듯 주머니에 가득 넣고 나온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가 끝나면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골목을 걸어 집까지 왔다. 맨 앞에 선 아이를 ‘줄반장’이라고 했다. 내가 살던 이수시장까지는 아이 걸음으로 걸어서 20분에서 30분이 걸렸고, 우리 줄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아이가 나였다. 그때 줄을 지어 걷던 길을 쌍둥이와 함께 걷는다.
“여기는 엄마가 학교 끝나고 집에 가다가 늘 들르던 놀이터야.”
놀이터를 보자 아이들은 미끄럼틀로 달려간다. 추운 날씨인데도 몇몇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 내 기억 속 놀이터에는 철봉과 미끄럼틀, 정글짐과 구름사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정글짐 자리에 커다란 대형 미끄럼틀이 놓여 있었다.
“엄마, 엄마도 미끄럼틀 타는 걸 좋아했어요?”
“아니, 엄마는 미끄럼틀보다 그네 타는 걸 더 좋아했어. 그네를 타다 보면 조금씩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거든.”
“나도 그네 타는 게 좋아요.”
“엄마는 친구들이랑 ‘짬뽕’이라는 손 야구 놀이도 하고, 피구 놀이도 했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노래에 맞춰 고무줄놀이도 자주 했고.”
그러고 보니 우리 때는 바깥놀이가 참 다양했다. 요즘 아이들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끝나면 놀이터로 몰려들어 미끄럼틀이나 그네를 차지하려고 자리다툼을 해야 할 때도 많은데 말이다.
다시 어린 시절 살던 옛집으로 가는 길. 두 곳의 큰 대형 교회들이 건물을 다시 지어 새 단장을 했을 뿐 20년에서 30년 넘은 2층 주택들은 대부분 그대로다. 오래된 담벼락, 낡은 간판이 달린 동네 상가들. 새로운 것과 옛것이 공존하는 골목길에서, 다시 30년 전으로 되돌아가 골목길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여자아이를 떠올려본다. 학교 가기 싫다고 떼쓰다가 아빠 손에 이끌려 학교 가던 일, 여섯 살 차이 나는 막냇동생이 학교에 따라오려 해서 돌을 던지며 떼어놓던 일, 집에서 키우던 똥개 ‘폴’이 학교까지 따라와 운동장을 배회하는 걸 보고 한참을 망설이다 선생님께 “우리 집 개예요”하고 고백했던 일, 몸이 아파 조퇴하고 집에 가던 날 길이 유독 멀게만 느껴지던 일···. 30년도 넘은 오래된 추억인데 그 당시의 감정과 몸의 느낌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내 추억의 절반은 여기, 오래된 골목길에 남아 있다.
추억 속으로 사라진 옛 시장, 단골 떡볶이 가게
고층 오피스텔이 들어서며 추억 속으로 사라진 이수시장 앞. 막다른 골목에 서 있던 2층짜리 쌍둥이 주택이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4층짜리 빌라들이 들어서 있다.
“여기가 엄마 집이었어.”
“엄마 집?”
“어. 오른쪽 집 지하 셋방에 살다가 왼쪽 집 2층으로 이사를 가서 한참 동안 살았지. 이 골목 아이들이 모두 친구였는데.”
“그럼 엄마 친구들은 다 어디 있어요?”
“글쎄… 보고 싶다.”
“엄마 친구들을 볼 수 없어요?” 큰아이가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어른이 되면, 볼 수 없는 게 많아져.”
“그럼 나는 어른 안 될래요.”
어린 시절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들도 세월의 힘 앞에서는 버틸 수가 없나 보다.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이수시장에는 없는 게 없었다. 지하에는 김밥집이며 떡집, 야채 가게가 즐비했다. 따뜻한 밥에 직접 만든 속재료를 가득 넣어 즉석에서 말아주던 김밥 맛은 지금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다. 우리 옆집에 살던 떡집 주인은 추석 때만 되면 우리 집 앞에까지 솔잎 향은 풍기는 송편을 잔뜩 만들어 식혀 놓곤 했는데….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군침도 많이 삼켰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떡볶이 가게 두 집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늘 그 앞에 서서 친구와 실랑이를 벌이곤 했었다. 친구는 오른쪽 집이 더 맛있다고 하고, 나는 왼쪽 집이 더 맛있다고 했다. 그 맛이 그 맛일 텐데, 아마 왼쪽 집 아줌마가 조금 더 친절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떡볶이 1인분을 주문하면 즉석에서 까만 프라이팬에 양배추와 떡, 채소와 갖가지 양념을 넣어 요리를 해줬다. 달콤 매콤한 그 떡볶이가 어른이 된 뒤에도 그리웠다. 혹시 근처에 그 떡볶이 집이 남아 있지 않을까 수소문해 보았지만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한 집은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 중간쯤에 가게를 열었다가 몇 년 못 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지금은 택배 주문만 받고 있단다.
“엄마, 그럼 우리 떡볶이 못 먹는 거예요?”
떡볶이를 좋아하는 여섯 살 어린이들을 위해 근처 떡볶이 집을 물색했지만 분식집이 다 문을 닫았다. 재건축을 앞둔 오래된 골목이라 가게들은 장사가 안 되는지 토요일 오후에도 문을 열지 않는다. 겨우겨우 찾아서 5분 거리에 있는 즉석 떡볶이 집을 들어갔다. 그 길에서 30년 전 다녔던 약국이 비록 자리를 옆으로 옮겼지만 남아 있는 걸 보고 반가운 마음을 숨길 수 없어, 간판을 보고 또 봤다. 우리 삼 남매가 오랫동안 다녔던 소아과는 그대로 있었고, 우리 집 강아지들이 다녔던 단골 동물병원은 통신사 대리점으로 바뀌었다.
매콤한 떡볶이를 물에 씻어 한입 베어 물더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먹기만 하는 아이들. 낡은 앨범에 나온 엄마의 초등학교 입학 사진을 보다가 길을 나선 오늘 하루의 골목 여행을 아이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일주일쯤 지나 아이들에게 물었다.
“엄마랑 엄마 학교 갔던 거 기억나?”
“네, 기억나요. 운동장이 아주 넓었어요. 막 뛰어다니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이런 말을 기대했는데 아이의 대답은 의외였다.
“기억나요. 엄마랑 문방구에서 장난감 뽑았잖아요.” 유난히 장난감을 좋아하는 작은아이가 답했다. 남자아이들에게 감성적인 추억 여행은 그림의 떡이었을까. 그때 큰아이가 입을 연다.
“골목길을 걸어 엄마 집에 갔었잖아요. 학교 운동장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고, 엄마가 다니던 길을 걸었고요. 문방구에서 장난감 뽑고 구슬도 샀어요. 형아들이 그린 그림도 봤잖아요. 그 그림에 미니언즈도 있었고요. 맛있는 떡볶이도 먹고 놀이터에서 미끄럼틀도 탔잖아요.”
그날의 기억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아이를 보며, 아이들과의 여행과 그 여정에서의 대화는 하나도 버리는 게 없음을 재확인했다. 문방구 앞에서 장난감 뽑기 한 기억만 남아도 괜찮다. 언젠가 허름한 추억의 문방구 앞에 서면, 그날의 다른 기억도 아련하게 떠오를 테니까. 엄마와 함께 엄마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학교와 골목길을 걸었던 기억이….
Tip 추억의 골목 여행을 풍성하게 해줄 활동
1 엄마의 어린 시절이 담긴 앨범 보며 이야기 나누기
엄마의 돌 사진, 외삼촌과 이모가 함께 찍은 어린 시절 사진은 물론 외할머니의 20대 모습이 담긴 앨범을 보며 30년 전 그 시절 생활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본다.
2 추억의 놀이 함께 즐기기
부모 세대만 해도 바깥에서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참 많았다.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작은 돌로 하는 땅따먹기, 바닥에 놀이판을 그리고 돌을 주워 돌아오는 사방치기, 작은 돌 5개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공기놀이, 콩주머니로 하는 오재미놀이, 실 하나만 있으면 가능한 실뜨기놀이 등을 함께해보자.
3 문방구에 들러 옛날 놀이 용품 사 보기
구슬, 공기, 고무줄 등 옛날 추억의 놀이 용품을 구입해 놀이터에서 함께 가지고 놀아보자. 근엄하게만 보이던 외할아버지에게 구슬치기를 배우며 외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엄마에게 공기놀이를 배우며 쌍둥이는 무척 재미있어 했다.
4 엄마와 걸었던 골목길 회상하기
아이와 걸었던 골목길에 대해 시간이 지난 뒤 이야기를 나눠보자. 늦겨울 추위 속에서 걸었던 길이지만, 일주일 뒤에도 아이는 그날의 코스를 정확히 기억해 냈다. 엄마나 아빠의 어린 시절이 담긴 골목길을 걸어 보는 것은 아이의 감성을 키워주는 좋은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