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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폴라리스 Mar 06. 2017

'느림'에서 발견한 삶의 가치

월간 <폴라리스> Vol.182  '행복하게, 슬로 육아'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등지고, 천천히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전 세계에서 일고 있다.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글 성소영  에디터 윤경민  포토그래퍼 강봉형  사진 제공 한국슬로시티본부, 이탈리아관광청, 덴마크관광청 참고 도서 손대현·장희정 <슬로시티의 행복>, 쓰지 신이치 <슬로라이프> 

무너진 삶을 되살리는 대안, 슬로라이프


자본주의와 경제 성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회는 많은 것을 파괴시킨다. 무분별한 개발은 자연을 훼손하고, 나아가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다. 경제 성장이라는 명목하에 쉼 없이 트랙 위를 달리기만 했던 사람들도 경제의 논리로 지배되는 세상에서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은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다. 이런 연유로 슬로라이프, 즉 느리게 사는 삶의 가치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영어권에서 통용되지 않던 ‘슬로라이프(Slow Life)’란 용어를 세상에 처음 선보인 사람은 일본의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다. 날로 황폐해지고 있는 인간의 삶과 지구를 되살리기 위한 대안으로 그는 ‘슬로라이프’를 제안한다. 슬로라이프는 그저 여유로운 생활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생활, 경제적 이익만 좇는 사회에서 벗어나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겨울이 지나야 꽃이 피고, 강렬한 태양빛이 쏟아지는 여름을 거쳐야만 달콤한 열매가 익는 자연의 섭리처럼 현대인의 삶에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필요한 때다. 



자연, 전통, 공동체가 어우러진 행복한 마을, 슬로시티 


1990년대 후반, 세상에 제기된 슬로라이프를 향한 갈증은 자연스레 공동체를 만드는 데까지 확산됐다. 빠르고 복잡한 도시에서 개인이 홀로 슬로라이프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했지만, 공동체의 힘을 빌리니 가능해졌다. 함께 사는 이들의 협조 아래 친환경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면, 무량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이 곧 슬로라이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슬로시티(Slow City)’는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99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nti)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돼 현재는 30개국 225개 도시(2016년 기준)의 슬로시티가 존재한다. 


슬로시티의 가장 큰 조건은 자연, 전통, 공동체의 조화와 상생이다. 인간 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오랜 행복을 위해 자연과 전통문화를 보호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활동을 하면서 지속 가능한 삶을 도모한다. 슬로시티는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7가지 영역(에너지 및 환경 정책, 인프라 정책, 도시 삶의 질 정책, 농업·관광·전통예술 보호 정책, 방문객 환대와 지역 주민 마인드, 사회적 연대, 파트너십)을 다각도로 평가받고, 실사를 거쳐 공식 인증을 받는다. 모든 슬로시티에는 특별한 조건이 붙는다. 인증된 이후에도 인구가 5만 명을 넘지 않고, 자연 생태계와 전통문화를 보호해야 한다. 또 유기농으로 생산되는 지역 특산물을 보유하고, 패스트푸드점이나 대형마트가 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 국내에는 담양군 창평, 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증도, 경남 하동·악양, 충남 예산, 전주 한옥마을, 경북 상주, 경북 청송, 강원 영월·김삿갓마을, 충북 제천, 남양주시 조안이 국제슬로시티연맹의 인증을 받았다. 


《 해외 슬로시티 



슬로시티의 역사가 시작되다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Grave in Chiannti)’ 


약 1만여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마을인 그레베 인 키안티는 슬로시티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소득과 인구가 점점 감소하고 마을이 활기를 잃어가던 1990년대, 이곳의 시장이었던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는 그레베 인 키안티를 되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급속한 개발 대신 전통을 고수하는 쪽을 택했다. 시장의 오랜 설득으로 주민들 또한 인간은 자연과 속도를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슬로시티’의 가치에 동의했고, 그레베 인 키안티만의 전통, 자연,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여유로움 등을 지역의 차별화 전략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외부 자본이 유입된 대형 슈퍼마켓은 물론 그 흔한 자판기 하나도 없다. 외부인의 부동산 소유 또한 제한된다. 대신 예로부터 유명한 와인과 올리브의 고장답게 계단식 경작을 하는 와이너리, 올리브 농장이 즐비하고 파스타, 와인 등은 모두 전통적인 수공업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2천여 년의 전통을 가진 마을의 와인, 8대째 전통 가업을 이어온 명인 ‘다리오 체키니’의 숙성 햄 등 다양한 지역 특산물도 존재한다. 100가지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깐띠네 지하 와인 창고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됐을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마을 안에서는 무엇이든 천천히, 정석대로 만들고 대기업에서 생산된 제품을 판매하지 않기 때문에 주민들은 자연스레 시장에 나와 장을 보고, 전통적인 식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수많은 장점 중에도 그레베 인 키안티의 가장 큰 자랑은, 슬로시티가 된 후 마을의 고용률이 100%가 됐다는 점이다. 이곳에 사는 모든 주민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소득 수준 또한 이탈리아 중소 도시의 평균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예스러움과 전통을 간직한 수작업의 가치를 인정해 이곳을 찾거나 지역 생산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덕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가 매년 마을을 찾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율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낮다고 한다. 


언뜻 불편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인가’를 고민하며 살아가면 진정한 행복이 깃든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는 마을이다. 




작은 마을이 만드는 지속 가능한 미래

덴마크 ‘스벤보르(Svendborg)’ 


덴마크 최초로 슬로시티에 지정된 스벤보르는 ‘삶을 즐기는 것’과 ‘느리게 사는 것’을 중요한 철학으로 삼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이곳에서는 ‘사려 깊은 도시 개발 계획’을 확정했다. 인간과 자연환경의 지속 가능한 공존을 위해 하나둘씩 생활 속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일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새로운 건축 기법이 도입된 특별 창문을 활용한 연립주택에 거주하며 풍차, 태양집열판 등을 이용해 생산된 친환경에너지를 사용한다. 덕분에 열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고, 이산화탄소 배출이 줄어 자연친화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지금의 깨끗한 자연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민의 일상을 바꾼 것이다. 


수백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덴마크의 마을답게 스벤보르에서는 고즈넉한 항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시간이 멈춘 듯 유유자적 떠 있는 선박의 모습과 탁 트인 바다 풍경에 반해 마을에 오래 머무르는 관광객들도 많은 편. 빙하시대에 만들어진 계곡, 너른 초원 등 다양한 자연 경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이곳의 매력이다. 바다와 숲, 동물이 어우러진 마을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예술의 씨앗을 움트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고향이기도 한 스벤보르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가 거주하며 지역 공예업을 발전시키는 데 힘쓰고 있다. 그들의 생생한 예술 활동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곳만의 특별한 즐거움. 예술 장인들이 만든 유리 제품 스튜디오, 패션디자이너 쇼룸, 조각갤러리 등 독특한 예술 작품이 가득한 마을에는 일 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동물을 방목해 기르고, 젖을 짜 치즈를 만들어 판매한다. 지역의 특성을 살린 축제도 개최되는데, 특산물인 치즈 축제를 비롯해 스벤보르 영화제, 국제 광대 축제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매년 6월 마지막 주 주말에 열리는 스벤보르 요리축제는 전 세계에서 1만 5천여 명 이상이 모이는 덴마크 최대의 요리 페스티벌이다. 전역에서 모인 식·음료 장인들이 만든 음식을 무료로 시식해볼 수 있고, 친환경적인 식품을 전시하는 코너도 마련돼 있어 직접 음식을 먹어보고, 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 국내 슬로시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섬, 

청산도 

‘산과 바다, 하늘이 모두 푸른 섬’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청산도(靑山島)는 완도항에서 배를 타고 50여 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이 왜 슬로시티인지 자연스레 체감할 수 있다. 푸른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섬에는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린 낮은 돌담길이 앙증하게 펼쳐지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토속적인 사투리가 들려오는 풍경이 마치 전래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청산도는 담양군 창평, 신안군 증도와 함께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은 곳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고 하여 ‘슬로길’이라 불리는 마을의 오솔길은 2011년 세계 슬로길 제1호로 지정됐다. 청산도에는 23개의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각 마을마다 20~50가구가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한다. 완도 끝 최남단의 이 섬은 문명과 단절된 신대륙처럼 고인돌, 초분, 해녀, 돌담, 구들장논 등 고유한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 슬로시티 인증을 위해 국제슬로시티연맹에서 실사를 나왔을 당시, ‘자연, 사람 모든 게 아름다운 완벽한 슬로시티’라는 극찬을 받았다. 


멋이 살아 숨 쉬다, 

청송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오목하게 자리하고 있는 경북 청송은 우리나라만이 가진 독특한 멋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면적의 80%가 산, 수목의 60%가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어 지리적으로도 느리고 친환경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고즈넉한 고장이다. 특히 슬로시티로 지정된 파천면과 부동면은 우뚝 솟은 산과 나무, 그 아래 자리한 고택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으로 특별한 아우라를 풍긴다. 
청송의 자랑, 주왕산 국립공원은 돌로 병풍을 친 듯 아름답고, 켜켜이 쌓인 산세마다 왕버들, 수달, 궁노루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한다. 130여 년 전통을 지킨 덕천마을의 ‘송소고택’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99칸 한옥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 이외에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통 고택은 청송을 둘러싼 푸른 산을 배경으로 한 폭의 동양화를 완성한다. 청송 한지, 청송 백자, 옹기장 등 전통 공예도 유명한데, 이를 만드는 장인들은 지난 500여 년간 이곳에서 대를 이어 느리게 사는 삶을 지켜 왔다. 청송은 내륙 깊숙이, 도시와 완전히 동떨어진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한적하게 삶의 여유를 느끼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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