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Vol.182 '행복하게, 슬로 육아'
자연은 자연답게
2008년 여름, 무더웠던 하루의 짧은 한순간을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작은 여치를 만났던 짧은 순간을…. 더위를 피해서 건물 뒤편 좁은 베란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낮은 유리 난간 너머에 나무 한 그루와 왕성하게 커가는 풀 그리고 살짝 불어오는 바람만으로 몸이 서서히 편안해졌다. 몸이 편안해지니 복잡하고 시끄럽던 머릿속이 잠잠해지며 이 시간만큼은 아무에게도 방해 받고 싶지 않았다. 이 장소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어주길 바랐다. 언제든 쉬고 싶을 때 찾아올 수 있게 말이다.
얼음으로 시원해진 음료를 들이켜는데 내 눈에 풀벌레 한 마리가 들어왔다. 유리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왜 그리 작고 불안해 보였는지 꼼짝할 수 없고 두 눈이 커졌다.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가버릴 것 같고, 유리 난간을 헛다리 짚으면 쭉 미끄러져 버릴 것 같아 천천히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랬더니 풀벌레는 당황하며 우왕좌왕 더 불안하게 움직였다. 더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풀벌레가 좀 무서웠는데도 나름 용기를 내 손을 뻗었는데 풀벌레가 휙 날개를 펴더니 날아갔다. 황당함과 부끄러움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풀벌레는 날개가 있구나!’ ‘내가 저 녀석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거구나’라고 생각하며.
지금이야 그 풀벌레가 여치라는 것을 알고, 여치가 육식 곤충으로 풀숲에서는 나름 강자에 속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땐 몰랐다. 여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면서 겉보기만으로 대충 판단해버린 거다. 순간의 경험이었지만 내가 도움의 손을 뻗은 것이 오히려 여치에게는 공포였음을 알았을 때의 충격은 다른 생명, 자연에 대한 내 편견이 오히려 폭력이 된다는 걸 깨닫는 강력한 경험이 됐다. 도와주는 것은 도움을 주는 쪽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쪽이 결정한다고 하는데 ‘내가 더 강하니까 도와줄 수 있다’는 일방적인 생각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실수를 만들어냈을까.
아이는 아이답게
작은 여치를 만났을 때는 두 아이를 낳기 전이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기쁨도 무한하지만 불안함도 같이 무한해졌다. 임신하자마자 병원을 찾아 추천 받은 영양제를 섭취하고 초음파 사진을 찍으며 한 달에 두 번 쪼그마한 태아를 만나며 감격했지만, 한편으로는 엄마 배 속에서 편하게 쉬고 있는 아이를 괜히 자꾸 확인하는 건 아닌지 미안함이 생겼다. ‘배 속의 아이를 믿어보자. 그리고 엄마가 되는 내 몸을 믿어보자’라는 마음으로 산부인과에 가는 횟수를 줄이고 조산원을 가기로 했다. 마음 한쪽에 불안감이 있었지만, 다행히 산부인과에서도 산모, 태아 모두 건강하다며 용기를 줬다. 막상 조산원에 가서 나이 지긋하고 경험이 많은 조산사들과 햇살 가득 들어오는 말끔한 방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출산 당시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세상에 나와 첫울음을 터트리던 그 순간에는 안심과 기쁨이 가득했었다. 첫아이에게 두 돌이 넘게 모유를 먹이며 자연스럽게 젖떼기에 성공했고, 기저귀 떼기도 서두르지 않고 아이가 준비가 됐을 때 하니 수월하게 넘어갔다. 지나갔으니 지금에야 잘했다 싶지만 ‘애기 낳다가 잘못되면 어쩌지?’ ‘모유를 너무 오래 먹이나?’ ‘네 살이면 기저귀 떼야 하는데 너무 늦었나?’ 안절부절못했던 순간도 많았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키우려 하지만 큰아이 아홉 살, 작은아이 다섯 살이 된 지금도 조마조마, 위태위태하고 불안한 마음이 크다. 마치 작은 여치를 보던 그때처럼.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며 작은 여치를 만났던 그때의 불안함과 기특함이 교차하고 반복된다. 그러면서 부모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겁이 많아 조심성이 많은 큰아이에게 ‘억지로 용기를 강요하지 않아야지’, 겁 없고 행동이 먼저인 작은아이에게 ‘억지로 호기심을 뺏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큰아이에게 용기 한 스푼을 넣고 싶고, 작은아이에게 신중함 한 스푼을 넣고 싶어진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 농사를 잘 짓고 싶을 것이다. 누가 봐도 크고 상처 없는, 보기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고 싶지만 모든 아이들이 완벽할 수 없다. 어른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어른의 부족한 점은 ‘그럴 수 있지’ 하며 넘어가면서도, 아이에게는 더 엄격하게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아마 아이는 성장하는 존재이기에 부모가 채워줄수록 더 크게 자랄 거라 욕심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모든 아이들을 똑같은 모양으로 키우기보다는, 흙에 좋은 비료를 잔뜩 넣어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자라도록 해주고 싶다. 약간 거칠더라도 충분히 좋은 흙에서 뿌리 내리고, 비와 바람과 햇살 받으며 알차게, 자연스럽게 말이다. 내가 손을 뻗는 것이 상처가 되지 않기를! 그래서 아이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여치처럼 커다란 모험을 할 수 있길!
이민희
1976년 한여름, 시골에서 태어나 자연의 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대학에서는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천문우주학을 전공했다. 자연과 밤하늘이 어릴 적 기억 그대로 있어 주길, 언제든 찾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는 그림책 작가이자 두 아이의 엄마다. 대표작으로 <라이카는 말했다> <옛날에는 돼지들이 아주 똑똑했어요> <별이 되고 싶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