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소설과 함께 여행하다
유럽 도시에는 예외 없이 성당이 있습니다. 관광은 주로 구도심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어서 이리저리 걷다 보면 중세에 지어진 성당들을 쉽게 만나게 됩니다. 골목을 돌면 나오고, 고개를 들면 뾰족 지붕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감탄을 하며 꼼곰하게 살펴보고 구석구석 들여다보지만 두 곳 세 곳 다니다 보면 신선한 인상은 어느새 휘발되고 모든 성당이 다 똑같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 고만고만하고 다 비슷비슷합니다.
수세기에 걸쳐 흘러내렸을 시커먼 빗물 흔적. 칙칙한 성당의 외벽은 긴 역사를 증명합니다. 세월은 무상해서, 성당이 도시의 구심점이 되고 모든 사람들이 신의 품으로 모여들던 시절은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도 불교가 번성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유럽의 기독교와는 경우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절이 도시의 구심점은 아니었죠. 하지만 유럽의 도시들은 성당이 이른바 도시의 심장이자 대동맥 역할을 했었지요. 성당들은 대체로 도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빈 껍질처럼 남은 성당들을 보는 게 좀 애처롭습니다. 과거에는 빈자리 없이 빽빽이 들어찼을 공간에 이제는 한 줌도 안 되는 신자만 방문합니다. 성스러운 공간은 간 데 없고 관광지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도 성스러움은 존재할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것의 당위성을 따지는 건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일 테지요. 다만, 예수님을 믿든 알라신을 믿든 부처님을 믿든, 살다 보면 신비와 성스러움을 간절히 원하는 시기가 찾아올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럴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도 꽤 있지 않겠어요.
묵직한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나를 맞이합니다. 서늘한 공기,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 스테인글라스에서 흘러들어오는 채색된 빛, 제대로 이어지는 희끄무레한 통로. 한쪽에는 촛불이 반짝입니다. 독실한 신자가 아니라면 스테인글라스에 계신 성인들과 천사들의 이야기를 해독할 길이 없습니다. 벽에 걸린 성화들은 순교자들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귀도 없습니다. 빛이 너무 어두워서도 그림을 알아보기조차 힘듭니다.
천천히 성당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성지순례를 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화 앞에서 성가를 부르고 있네요. 그들에게는 중요한 성인이 그 어두운 성화 안에 계셨던가 봅니다. 팔뚝에 문신을 한 중년 남자 한 명이 배낭을 진 채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간절한 소망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있는 걸까요.
때로는 무지함이 순수함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인지 고딕 양식인지, 건축사에 관해서 아는 게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지식의 옷을 입지 않은 마음으로, 성당의 어둠 속에 가만히 잠깁니다. 아빠를 따라 들어온 대여섯 살 꼬마가 성당의 돌바닥을 뛰어다닙니다. 수세기를 이곳에 머물고 있는 신비 속에서요.
방문하는 성당마다 성모마리아 상 앞에 초를 밝혔습니다. 때로는 아기 예수를 안고, 때로는 홀로, 때로는 십자가에서 내린 죽은 예수를 안고 고개를 떨군 자세로, 또 때로는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하늘을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 앞에 초를 밝힙니다. 작은 것은 1유로, 큰 것은 2유로나 3유로. 어떤 성당에서는 긴 초를 꽂고 어떤 성당에서는 작은 초를 또 어떤 성당에서는 큰 초를 꽂습니다. 이 작은 불을 밝혀서 지금 나는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기어코 예수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봐야 의심을 거둘 수 있었던 도마처럼 나의 의심도 고질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를 밝힐 수밖에 없는 이 마음은 뭔가.
성모마리아의 고통은 인간적입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이지요. 그녀는 눈물을 흘립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그녀가 있어서 우리의 슬픔이 기댈 데가 있습니다. 그녀의 크고 깊은 슬픔으로 우리의 슬픔이 녹습니다. 이번 여름 비로소 성모마리아가 그 자리에 계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보르도였는지 엑상프로방스였는지, 한 작은 성당의 성모마리아상 앞에 기도문을 적는 방문노트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몇 장을 앞으로 넘겨보았습니다. 굳이 읽으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영어나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나 독일어쯤 됐겠지요. 다만, 기도문을 적었을 그들의 간절함만을 떠올렸습니다. 마지막 기도문 아래에 한글로 적어 넣었습니다.
당신의 큰 슬픔으로
저의 슬픔이 위로받습니다.
당신의 슬픔과 사랑으로
저의 사랑하는 이를 살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