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5 : 보르도의 평범한 하루

발자크의 소설과 함께 여행하다

by 스프링버드


드넓은 포도밭만 연상했던 보르도였는데 알고 보니 도시가 의외로 크고 화려했습니다. 투르가 전형적인 중세 도시라면, 보르도는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진 이래 역사 내내 위상이 높았던 도시였습니다. 유럽의 식민주의 시대에는 프랑스 식민제국의 관문 역할을 하며 최전성기를 누립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생산된 산물들이 모두 이곳으로 들어왔고 프랑스 남부의 최고급 와인이 모두 이곳을 통해서 나갔습니다. 그래서 파리 못지않은 번영을 누렸다고 하네요. 과거의 영화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지, 도시 인구만 해도 25만이 넘고 주변 인구까지 합치면 110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군요.


보르도의 중심부를 가론 강이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누런 흙탕물입니다. 유속이 그만큼 세다는 의미겠지요. 이쪽 강변에서 저쪽 강변으로 배가 사람들을 실어가고 실어옵니다. 강을 끼고 강의 이편은 구도심이, 강의 저편은 신도심이 형성돼 있습니다. 3,4층 정도의 석조 건물들이 줄을 지어 강을 따라 길게 길게 뻗어있는 구도심은 과거의 영화가 어떠했는지를 생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자인 나에게 보르도는 화려한 과거와 대도시로서의 현재 위상을 과시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식료품점에서 만난 직원의 따뜻한 배려 때문일까요, 날씨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그날의 내 기분 탓일까요. 내가 본 보르도는 어깨를 잔뜩 추켜 올린 위세 등등 한 모습이 아닌, 다정하고 격의 없는 생활인의 얼굴이었습니다.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에서 프랑스 남부 사람들의 기질을 여러 번 언급합니다. 다음 대목을 읽어보면, 그것은 아마도 민첩하고 대담한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외젠 라스티냐크)의 장점 중에는, 어려움이 닥쳐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곧장 전진하는 남부 사람 특유의 민첩함도 있었다. 그런 기질 덕분에 루아르 강 남쪽 출신의 사람들은 어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그냥 뭉개고 있지를 못한다. 북부 사람들은 이 장점을 결점이라고 부른다.


며칠 간의 짧은 여행에서 프랑스 남부 사람들의 기질을 감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활력이 느껴지기는 했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웁니다. '물의 거울'을 보러 왔습니다. 그곳은 강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광장으로, 판판한 검은 판석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판석 사이로 물이 분무되어 물안개를 만듭니다. 물이 뿜어져 나오자 아이들이 신나게 뛰기 시작합니다. 옷이 젖어도 좋아라 뜁니다. 팬티만 입고 달리는 아이들도 있네요. 자그마한 발바닥으로 찹찹찹찹... 3개월이나 됐을까,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와 "놀아봐, 놀아봐." 하는 개 아빠도 보입니다. 강아지는 겁이 나나 봅니다. 귀가 쪼그라들었어요.





물안개가 가라앉습니다. 물에 젖어 반들거리는 판석에 마치 호수처럼 건너편 건물이 아름답게 비칩니다. 그래서 물의 거울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군요. 뛰어노는 아이들 눈에 건물은 안 보이겠지요. 비치는 건 오로지 하늘, 반짝이는 햇살일 것입니다. 멀찍이 바라보는 내 눈에만 건물의 영상이 들어옵니다.





아이들이 물을 튀겨 건물의 영상을 온전히 찍지 못해 누군가는 조바심을 내지만 물의 거울은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완성됩니다. 통통한 발바닥으로, 탱탱해진 몸으로, 하늘거리는 머리칼로, 강물소리로, 몸의 속도감으로 바닥을 치고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으로요.


길 건너편 또 다른 작은 광장에서는 맘보 음악이 울려 퍼지고, 줄을 지어 춤을 추며 사람들이 웃습니다. '재밌어 죽겠어!' 하는 표정으로요. 공원의 큰 나무를 두른 벤치에 앉습니다. 내 앞쪽으로는 동성의 애인들이 풀밭 위에 드러누워 서로를 쓰다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십 대 아이들이 조잘대며 웃고 떠듭니다. 수다, 수다... 개 한 마리가 아이들 뒤로 공을 톡, 떨어뜨립니다. 아이들은 꺅 비명을 지르네요. 십 대 다운 호들갑을 떨면서요. 주인은 공을 주워 다시 던집니다. 개가 이번에는 내 앞에 와서 공을 떨어뜨립니다. 톡!


얇은 시폰 원피스에 긴 머리칼을 날리며 아가씨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갑니다. 박스를 싣고 또 한 명의 아가씨가 지나가고, 중년 남자가 지나가고, 젊은 남자가 지나가고, 중년 여자가 지나가고... 자전거의 바큇살이 햇빛을 반사하며 경쾌하게 돌아갑니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바람은 부드럽고 상쾌합니다. 그리고 잠깐의 달콤한 낮잠. 수채화 물감처럼 맑고 옅게 보르도의 풍경이 하얀 도화지를 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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