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받아 마땅한 삶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한 땅뙈기에 바치는 헌사

by 스프링버드


한 땅뙈기에 바치는 헌사


이 땅뙈기는

저 작은 만을 향하고 있는 이곳은

에밀리 디킨슨 웰컴

살아있는 그 영혼에게 봉헌되니,

그녀는 영국에서 태어나, 결혼했고,

남편을 잃어

다섯 살 아들과 함께

뉴욕행 배의 이등칸에 올랐고,

아조레스제도까지 떠밀려갔고,

파이어섬 모래톱으로 정처 없이 흘러들어 갔고,

한 브루클린 하숙집에서

두 번째 남편을 만났고,

그와 함께 푸에토리코까지 갔고,

세 아이를 더 낳았고, 그만

두 번째 남편을 잃었고, 힘들게

팔 년 동안 세인트토마스,

푸에토리코, 산도밍고에서 살았고, 이어서

장남을 따라 뉴욕으로 왔고,

자기 딸, 자기 "아가"를 잃었고,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장남의

두 사내아이를 꽉 붙들어 안고

어미처럼 보살폈고 ― 엄마 잃은

그들을 ― 그들을 지켜내려

외할미와

이모들에 맞서 싸웠고, 그들을 여기로

여름마다 데려왔고, 여기에서 스스로를 지켜냈다

도둑들에,

태풍에, 태양에, 화재에 맞서서,

파리에 맞서서, 계집애들에 맞서서

주변을 얼진대는 그것들에, 또한

가뭄에 맞서서, 잡초에, 해일에,

이웃에, 닭을 훔쳐가는 족제비에 맞서서,

자기 손의 쇠약함에 맞서서,

커가는 사내아이들의

억센 힘에 맞서서, 바람에 맞서서, 또한

자갈들에 맞서서, 잡초에 맞서서, 침입자들에 맞서서,

월세에 맞서서, 자신의 마음에 맞서서.


그녀는 자기 손으로 직접 이 땅을 일궜고,

이 잡풀투성이 땅뙈기를 제압했고,

우격다짐으로 큰아들로 하여금

이걸 사게 했고, 십오 년을 여기서 살았고,

마지막 외로움에 이르렀으니 ―

혹여 이곳에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당신의 몸뚱이뿐이라면, 들어오지 말라.



여기에 무슨 감상을 덧붙이랴. 시인의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지만, 시에 붙이는 내 감상은 모두 사족이다.

사족이고, 쓸데없는 헛소리인 줄 알면서도, 다음 구절에 대해서는 꼭 얘기를 하고 싶다.

"마지막 외로움에 이르렀으니 "에 대해서.

원문에서는 이렇다:

She........ attained a final loneliness and―


...... 부분에는 온갖 삶의 어려움들이 나열되는데, 그것들과 맞서서 스스로를 지켜내고 이겨내면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궈낸 자그마한 땅, 땅뙈기에서 인생 후반기의 십오 년을 산 뒤에, 그녀는 마지막 외로움에 도달했다.


attain은 '도달했다/이르렀다'로도 해석되지만 '얻다/획득하다'의 뜻도 갖고 있다. 어느 쪽일까?

나는 전자일 것 같다. 그녀는 길고 힘든 굽은 길을 투쟁하며 걸어갔고, 쇠약해지는 두 손과 흔들리는 마음을 이겨내 가며 끝까지 걸어가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 단계는 다름 아닌 loneliness, 외로움이다.

이 시집의 번역자 정은귀 씨는 이 단어를 '고독'으로 옮기셨다. 그러나 고독은 자신이 홀로 있기를 원하는 상태이고 외로움은 행복하지 않은 상태이다.

내 생각에, 죽음의 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꼭 거쳐야 할 단계, 그것은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일 것만 같다.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단계. 안타깝지만, 그 길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밀리 디킨슨 웰컴, 그녀는 그것마저 맞서서 꿋꿋하게 통과했으리라. 앞서서 그녀는 무수한 맞섬을 이뤄냈으니 이것마저도 맞서 싸우지 않았을까. 그렇게 해서 그녀의 삶은 마침내 고귀하게 완성되니, 그녀가 잠든 그곳에 누가 함부로 불쑥 들어갈 수 있겠나.


어쩌면 누군가는 그 삶의 마지막 단계를 평화롭게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드문 사람이다. 그러나 설사 외롭더라도 그것에 맞서는 당당함은 어쩌면 우아한 고독보다 더 존경스러운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몸뚱이'로 옮긴 시인의 단어는 'carcass'다. 큰 동물의 사체. 그것은 영혼이 빠진 고깃덩어리일 뿐.

영혼이라는 말을 쓰면 불편한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짐작된다. 아무튼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면, 내 생각에, 에밀리 디킨슨 웰컴으로 대표되는 무수한 귀한 이들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은 영혼 없는 몸뚱이로 이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교만일 것 같다.

교만하여 목을 뻣뻣하게 세운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싫다. 아니, 교만이 싫단 말이 맞겠다.


삶의 고비에서 온갖 어려움과 맞서 싸우고,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과 맞서 싸우고, 아픈 무릎과 아픈 발과 아픈 손과 맞서 싸우며 삶을 살아낸 이들을 감히 그 어떤 사람이 모욕한단 말인가. 누추한 삶 앞에서 고개 숙이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교만한 사람을 빼고는.


그래서 불경에도 성경에도 교만하지 말라는 말이 수시로 나오는 게 아닌지. 귀한 사람들을 모욕하지 말라고 되풀이해서 경고하고 또 경고하는 것은 그만큼 교만이 우리 인간의 뿌리 깊은 본성이란 뜻인가, 미루어 짐작해 본다.




Dedication for a Plot of Ground


This plot of ground

facing the waters of this inlet

is dedicated to the living presence of

Emily Dickinson Wellcome

who was born in England, married,

lost her husband and with

her five year old son

sailed for New York in a two-master,

was driven to the Azores;

ran drift on Fire Island shoal,

met her second husband

in a Brooklyn boarding house,

went with him to Puerto Rico

bore three more children, lost

her second husband, lived hard

for eight years in St. Thomas,

Puerto Rico, San Domingo, followed

the oldest son to New York,

lost her daughter, lost her "baby",

seized the two boys of

the oldest son by the second marriage

mothered them ― they being

motherless ― fought for them

against the other grandmather

and the aunts, brought them here

summer after summer, defended

herself here against thieves,

storms, sun, fire,

against flies, against girls

that came smelling about, against

drought, againt weeds, storm-tides,

neghbors, weasels that stole her chickens,

against the weakness of her own hands,

against the growing strength of

the boys, against wind, against

the stones, against trespassers,

against rents, against her own mind.


She grubbed this earth with her own hands,

domineerd over this grass plot,

blackguarded her oldest son

into buying it, lived here fifteen years,

attained a final loneliness and―

If you can bring nothing to this place

but your carcass, keep out.





* 커버 그림은 에곤 쉴레의 작품입니다.

* 민음사에서 출판된 영한대역 시집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 2021년판에서 발췌한 시입니다. 정은귀 번역자의 번역이 아닌 제 언어로 다시 번역했습니다.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핑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