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와 이진명의 시
길을 걷는다.
언제 나섰는지 기억도 까마득한 길
사연이 많았던 것 같지만 히미해지고
지금의 길만 이어지는데,
문득 한적한 길에 들어섰다.
자그맣고 하얀 집이 길가에 가만히 앉아있다.
창문은 어둡고 지붕은 낮고 단정한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젊은 시인이 살았다고 하는데
듣기로 그는 떠났다는데
어쩐지 영영 떠난 것 같지 않은 조용하고 작은 집.
아직도 집을 감싸고 있는 시인의 향기.
그 이웃에 또 한 집이 있어서
허름하지만 다정하다.
이진명
나는 한 아름다운 집을 기억합니다
여름에 그 집은 더욱 아름다웠고 하염없었습니다
그 집은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의 한 동네
막다른 길 끝에 있었습니다
산책을 좋아하는 나는 한여름에도 동네 길을 오릅니다
그 집은 동네에서 제일 야트막했고
제일 헐어 보였습니다
기와지붕은 비닐로 덧대고 돌로 눌러놓았습니다
대문은 나무로 짠 구식이었는데
하늘색 칠이 거의 벗겨진 채였습니다
이 집 사람들은 기와 고칠 염도
대문을 새로 칠할 염도 내지 않으려나 봅니다
그렇게 여름날의 산책에서 그 집을 처음 보았습니다
집 모양새에 비해 뒤 터는 아주 넓었습니다
주위의 새로 지은 이층집 덩치들도
그 넓은 뒤 터는 막지 못했습니다
무 배추 상추 쑥갓 시금치 파 고추
뒤 터는 내가 헤아릴 수 있는 이름의 푸른 것들이 한껏
일궈져 있었습니다
담장에 붙어 까치발을 하면 그것들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집의 노인네였을 테지요
양손에 호미와 물뿌리개를 나눠 든 노인네
호미와 물뿌리개를 놓고 다시
저쪽 가에서 물 대는 호스를 끌고 오는 노인네
노인네는 구부정한 등 펴는 법 없어
담장에 붙어선 나와 마주친 적 없습니다
한여름 내내 쉬는 날의 산책은 그 집을 향했습니다
동네의 막다른 길 끝
그러나 뒤 터 한쪽은 하늘까지라도 뚫렸지요
푸른 것들의 이름을 읽으려
담장에 붙어 까치발하곤 하던 나날
노인네 안 보이면
햇빛 아래 놓여진 빈 물뿌리개
푸른 것들 속에 끌어당겨진 호스를 대신 보았습니다
상추 시금치 쑥갓...
하고 읽어가다가
담 밑 어느 결에 놓여진
그물끈이 풀어졌을 그물의자를 대신 보았습니다
그물의자 등에 수건이 걸쳐져 있는 것을 대신 보았습니다
여름 햇빛은 그 집의 뒤 터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쏟아지는 이미지처럼
담장에 매달린 내 얼굴은 그 여름 내내
사과알로 발갛게 만들어져갔습니다
이 집 너머로는 길이 없다는데
뒷마당은 넓은 뒤터가 하늘까지 뚫렸다는데
실제로 그럴지는 가보기 전까지는 모르지.
그 사이 뭔가 변했을지도.
노인은 돌아가시고 시인의 발간 사과알은 시들었을지도.
하지만 전해 들은 담 안의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시인이 살았다는 집과 시인이 기억하는 집이
꿈처럼 이웃해 있다.
두 집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막다른 길을 돌아 나온다.
아마도 짐작건대 어떤 길이 있어서
어디로 이끌지 아직은 모르는 어떤 길이 있어서
나보다 현명한 두 발이 이끄는 데로
내 길을 걷는다.
*기형도, <잎속의 검은 잎>(1989)
* 이진명,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