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렌클의 책을 읽고
이 책은 많은 죽음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글쓴이 렌클은 자신이 목격한 죽음들과, 사랑했으나 보내주어야 했던 가족들과, 죽음을 대하는 자연의 태도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렌클의 세 살배기 아이는 어느 날 도로에 짓뭉개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새를 보고 묻는다. “이게 뭐야?” 렌클은 사랑하는 아이가 진실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사실대로 말해준다. “새야.” 죽은 새를 보고 난 뒤 아이는 죽음에 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물고기들은 죽어요? 청설모들은 죽어요? 선생님들은, 상점의 이 사람들은, 엄마들은 모두 죽어요? 그리고 이 어린 철학자는 결국 핵심에 이르렀다. 내가 죽게 될까요?
죽음을 탐구하던 아이는 아마도 곧 다른 탐구 주제로 넘어갔을 것이다. 죽음을 오래 붙들고 있기에는 생명의 매혹이 너무나 강렬했을 테니까. 긴 시간이 흘러 다시 죽음의 주제로 돌아오기 전까지 아이는 삶의 주제에 붙들려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죽음에 관해 무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은 결국 죽음으로 귀착된다. 강이 바다로 흐르듯 삶은 죽음으로 진행된다. 나비의 죽음으로, 달팽이와 곤충의 죽음으로, 새와 토끼와 개의 죽음으로. 죽음의 먼 소문으로부터 친구의 죽음과 부모 형제 자식의 죽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의 죽음에 이른다. 사랑과 눈물에 인색한 사람이어도 이 마지막 죽음 앞에서는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며 마음이 휘청되리라.
최종적으로 나의 죽음에 이르기 전에도 우리는 조금씩 죽음을 겪는다. 매번의 작별이 나의 작은 죽음들인 것이다.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어가요. 책에 인용된 엘라 피츠제럴드의 노래 가사이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우리는 죽음을 체험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일부가 실제로 죽는 것이다. 사랑했던 나의 마음이 떠난 이와 함께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니까.
렌클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사랑했고 곁에서 돌봤다. (서양 문화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어쩌면 우리는 서양인들을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미국인도 연로한 엄마를 가까이에서 돌봤다.) 돌봄은 사랑으로만 버티기에는 벅찬 일이어서, 때때로 어머니의 장수하는 유전자에 절망했다고 렌클은 고백한다. 또한 자신의 빠듯한 시간을 내어주길 바라는 말기암 환자 아버지의 청도 거절했다. 어머니가 앰뷸런스를 타고 가던 위태롭던 순간에 손을 잡아주지도 못했다. 사랑을 한 대가로 우리는 사랑의 어둠까지 떠안아야 한다. 사랑은 한 조로 움직인다. 빛과 어둠으로, 기쁨과 고통으로. 사랑의 기쁨 속에서 고통은 더 치명적이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다음 날, 이웃이 몰래 갖다 놓은 바구니에 크림이 들어있었고, 밤새 잠을 못 이뤘던 렌클은 문득 커피에 크림을 넣어 마셔보고 싶었다. 커피에 떨어진 크림 한 방울은 온천 속 화산처럼 분출했고 신부의 레이스처럼 풀려나갔으며 어두운 바다 위 불꽃놀이처럼 터지고 고요한 초원 밤하늘의 별처럼 날아갔다. 렌클의 말대로, 세상은 이렇게 계속되는 것이다. 어둔 밤 조명의 뒤편에서 왕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장면을 보며 렌클은 말한다. 어둠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 약간의 선량함을 숨기고 있다. 선량함이라고? 그렇다. 어둠은 왕거미를 숨겨주니까. 약간이라고? 그렇다. 밝은 전등빛에 나방이 거미줄에 포획되니까.
빛이 어둠과 한 짝이듯 삶은 죽음과 한 짝이다. 아니, 내 생각에 삶과 죽음은 하나인 것 같다. 그것은 마치 애벌레가 고치가 되는 과정과도 같아서, 하나의 삶이 죽으면서 동시에 하나의 삶이 다시 태어난다. 애벌레가 약간 움직이고, 마침내 나는 깨닫는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웃자란 피부를 찢고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부터 기어서 달아나는, 삶의 다음 단계에 도달하기 전의 휴지 상태일 뿐임을. 그것은 새로운 생물이다. 심지어 그것은 다시 시작하기 전에 다시 시작한다. 애벌레의 변태가 단지 죽음을 겪고도 산 자의 삶은 계속된다는 비유에 그치란 법이 있을까? 이런 상상도 해본다. 떠난 이도 나비처럼 인간의 육신을 벗고 다른 몸이 되어 다른 삶을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고. 이것이 완전한 작별을 거부하려는 안타깝고 어리석은 상상인지도 모르겠으나, 누가 알리, 진실의 실체를.
자연 속에는 탄생이 있고 살아감이 있고 죽음이 있다. 자연은 냉정해서 작별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새나 나무처럼 무심하게 태어나 살고 죽는 것인데, 작은 새가 알을 강탈하는 뱀을 향해 격렬하게 울부짖고 잠시 절망한 뒤 다시 알을 낳아 새끼를 길러내고 떠나보내듯, 자연의 초연함을 보며 죽음 앞에서 슬픔을 진정하려고 애쓴다. 작별의 눈물을 훔치며. 우리는 자연이되 또한 인간이어서 작별의 눈물은 끝내 마르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원서의 제목은 <늦은 이주>, 부제는 <사랑과 상실의 자연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