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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Aug 08. 2024

신을 품은 사람, 에티 힐레숨






에티 힐레숨은 네덜란드 유대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에티 힐레숨은 열한 권의 일기와 많은 편지들을 남겼다.      

이 책은 에티의 일기와 편지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추린 일종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글을 모두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책에 인용된 글들을 통해서나마 에티 힐레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책의 부제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이고 저자 패트릭 우드하우스는 영국 성공회 사제인 걸로 미루어, 근본적 변화란 신을 모르던 사람이 신을 알게 된 것을 뜻하는 것이려니 짐작했다. 책 날개에도 에티 힐레숨의 일기와 편지가 ‘홀로코스트 시대의 가장 놀라운 신앙 고백 문서’라고 소개돼 있다. 하지만 그녀는 초교파적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녀의 ‘신’은 기독교라든가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기성 종교의 신으로 한정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신은 그 신들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곳, 더 근원적인 곳에 머문다. 그녀의 가방 속에는 이슬람 경전 코란과 유대교의 탈무드가 들어있었고, 그녀가 애독한 책들은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시인 릴케 그리고 신약성서였다.       


에티 힐레숨을 짧게 요약해서 설명할 방도를 모르겠다. 마치 신약성서의 바울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의 회심이 신비로웠던 것처럼 에티 힐레숨의 그것도 그렇다. 그녀의 정신세계는 깊고도 넓어서 간단히 가늠할 수 없고, 마치 성경을 읽듯 한 줄 한 줄을 세심하게 읽으며 오래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모든 사람은 자기 내부로 시선을 돌려서, 남들 내부에서 파괴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을 자기 내부에서 파괴해야만 해. 우리가 세상에 아주 작은 것이라도 증오를 더하면 더할수록 세상을 더 살기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     


- 최근에 깨달았다. 모든 순간은 새로운 순간을 낳고, 생생한 가능성이 충만하며,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 같을 때가 있다. 문제가 있는 순간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부질없이 오래 끌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풍요로운 순간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장대한 일련의 순간들이 끊임없는 흐름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 지금 나는 햇빛 아래 작은 테라스의 쓰레기통 위에 앉아서 빨래통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밤나무의 단단하고 짙은 색 가지 위에 해가 걸려있는데, 과거와 분명히 달라진 게 있다.... 과거에는 지성으로 나무와 태양을 받아들였다. 그것들이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지 말로 쓰고 싶었고, 모든 게 서로 잘 어울리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 깊은 원시적 느낌을 정신으로 헤아리고 싶었다... 다시 말해 나는 자연과 모든 걸 나에게 복종시키고 싶었다. 그것을 설명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일어나는 그대로 놓아둔다... 햇빛 아래 앉아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였는데, 마치 이 새로운 삶의 인식을 더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문득 깊은 내면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손에 묻은 채,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생각으로는 아무 데도 도달할 수 없다. 생각은 학문 연구에 훌륭하고 뛰어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감정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전혀 다른 것이 필요하다. 감정을 다루려면 수동적이 되어야 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 조각 영원과의 접촉을 회복해야 한다.     


- 언젠가 분명히 생각과 감정의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한다. 말하지 않고 외부의 소리를 듣지 않고 완전히 침묵하고 가장 깊은 존재의 소리가 울리게 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 내 안에서 가장 깊고 최선인 것, 그것의 이름은 신이다.      


- 지금은 전쟁 중이다... 사람들은 겁을 먹었고, 그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는 걸 안다. 박해와 억압, 독재, 무력한 격노, 잔인한 가학증에 대해서도 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안다... 하지만 내가 무방비 상태일 때, 혼자 남았을 때, 나는 문득 삶의 맨 가슴the naked breast of life에 안긴다. 삶의 팔은 나를 감싸며 부드럽게 보호해 주고, 나의 심장 박동은 아주 느리고 규칙적이며 부드럽고 조용하고도 한결같이 뛴다. 그것은 지극히 선하고 자비롭다. 삶에 대한 나의 태도도 그렇다. 전쟁이나 그 어떤 몰상식한 인간의 잔학 행위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 한가지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즉 당신(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스스로를 돕기 위해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신이여,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작은 조각을 보호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보살핍니다.      


- 중요한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느냐다.      


- 밤에 수용소에서 판자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주위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이 조용히 코를 골거나 꿈꾸면서 소리를 내거나 가만히 흐느끼거나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낮에 나에게 “우리는 생각하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도 않아. 생각하고 느낀다면 분명히 미쳐 버릴 거야.”라고 자주 말했다. 나는 몇 시간이고 잠들지 않은 채 누워서, 한없는 다정함으로... “제가 이 막사의 생각하는 가슴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 슬픔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슬픔으로부터 도망가면 안 되고 어른스럽게 슬픔을 견뎌야 한다. 증오를 통해 슬픔을 줄이려 하지 말고, 모든 독일의 어머니들에게 복수하려 하지도 말라... 모든 사람이 슬픔을 정직하고 용감하게 견디면, 세상을 가득 채운 슬픔이 누그러질 것이다.     


-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국경이 없다.     


- (암스테르담의 긴 도로를 터벅터벅 걸으며 유대인 출입이 금지된 길가의 카페들을 지나쳤고, 옆으로 유대인 탑승 금지 전차가 지나갔다. 그 순간 에티는 깨달았다.)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땅 위에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며 지치고 발이 벗겨졌다... 내가 지치고 병들고 두려울 때 난 혼자가 아니다... 나는 수백 년 동안 살았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하나이고, 모든 고통은 삶의 일부다.      


- 만일 (수용소로 가라는) 소환장이 내일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내면으로 물러나 내 몸과 영혼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기력을 모두 끌어모을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스틱은 던져버릴 테다. 그 주가 끝나기 전에 릴케의 편지를 마저 읽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 뒀던 두꺼운 겨울 외투 옷감으로 바지 한 벌과 상의를 만들어야겠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를 최선을 다해 안심시킬 것이고, 짬이 날 때마다 그에게, 언제나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길 원할 것이다... 조만간 치과에 가서 많고 많은 충치를 때워야겠다. 수용소에 있을 때 이가 아프면 정말 끔찍할 테니까. 배낭을 구해서 꼭 필요한 것들만 채워 넣을 것이다. 어쨌든 모두 품질 좋은 것들이어야 한다. 성경을 가지고 갈 것이고, 릴케의 얇은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도 가져가고 <기도시집>도 한 구석에 끼워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진은 가져가지 않겠다. 다만 그들의 얼굴과 익숙한 몸짓들을 모아 마음 속의 공간 벽에 걸어두겠다. 그러면 그들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이 두 손과, 단단한 어린 가지처럼 표현이 풍부한 손가락들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그러면 두 손은 기도로 나를 보호해 주고 마지막까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탐색하는 표정을 지닌 짙은 색 눈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 한때 히틀러가 나오고, 다른 때는 폭군 이반 4세가 나오고, 다른 때는 종교재판이, 그 다음에는 전쟁, 전염병, 지진, 기근이 일어난다.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고통을 견디는 것, 고통에 대처하는 것, 자기 영혼의 작은 구석도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 그렇다. 우리는 내면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신과 천국은 물론 지옥과 땅과 생명과 죽음과 모든 역사가 우리 안에 있다. 외부는 단지 많은 버팀목일 뿐이고, 필요한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선한 것과 더불어 악한 것까지,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악한 것을 고치는 데 삶을 바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 우리는 개인들에게 증오를 쏟을 수 없다. 어느 한 사람을 비난하면 안 된다. 체제가 그들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그들도 자신이 처한 특정한 개인적 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받아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들도 슬픔,  불의, 굴욕에 대응해야 하고 끔찍한 부당함과 굴욕을 겪을 때도 있다. 나치 이데올로기가 모든 사람의 집단적 마음을 해쳤다.) 불온한 구조는 무너질 수 있다. 우리 모두의 머리 위로, 심문 당하는 사람은 물론 심문 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도 무너질 수 있다.



* 대문 그림은 마르크 샤갈의 <푸른 다윗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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