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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프링버드 Aug 12. 2024

셰익스피어 읽기...


...를 망설였다. 실은 지금도 망설이고 있다. 최대한 단순하게 살자는 바람은 언제나 바람일 뿐, 머릿속은 분주하게 새로운 일들을 꾸며댄다. 언젠가 누가 옷장 속 겨울 외투 주머니에서 백만 원을 발견했다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천원도 아니고 만원도 아니고 백만 원을? 세상에! 그걸 공돈이라고 해야 할지를 놓고 수다를 떨었는데, 어쨌거나 그 큰돈을 잊어버렸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백만 원쯤 빈 건 알아챌 수도 없게 살림이 넉넉한 것인지 그게 궁금할 뿐인데, 솔직히 남의 말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단순한 삶'이란 가치는 백만 원에 비길 바가 아니지 않은가. 중요한 가치는 (고의적으로) 망각된다는 법칙이라도 세워야 할까 보다.


단순한 삶에는 적게 읽고 적게 생각하기도 포함된다. 책 속에 길이 있단 말을 믿는다. 하지만 모든 책 속에 길이 있는 건 아니고, 책 속의 길을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다독보다는 정독에 무게를 두는데도, 먹으면 자꾸 먹고 싶은 것처럼 책은 자꾸만 책을 불러서 읽을 책은 쌓여만 가고, 읽은 책들은 잊혀만 간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를 읽겠다고 또 무슨 욕심을 부리는 것이냐... 내가 한심해 죽겠다.


아무튼 셰익스피어의 중요한 희곡은 꽤 읽은 편인데 그때의 독서 경험이 참 좋았더랬다. 인물마다 하나의 감정을 대표해서, 무대 위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은 인간성의 한 면이 다른 면들과 대결하는 장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리어왕의 어리석음과 이기심, 그의 딸들이 보여주는 잔인한 인간성, 이천 년 전 오이디푸스왕의 고뇌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햄릿의 고뇌, 그리고 이야고의 악한 본성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다양한 심성을 극단적으로 인격화한 것처럼 보였다. 과연 천재였다, 셰익스피어는.


최근에 셰익스피어의 전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일어난 데에는 나와 남을 포함한 인간의 삶에 대한 회의와 불신과 염증 같은 것,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고 놓쳐서는 안 될 선량하고 밝은 면, 희망 같은 것을 서랍 정리하듯 분명하게 정리해보고 싶단 마음이 작동했던 때문이었다. 놓치는 것 없이, 넘치는 것 없이 말이다. 이건 서랍을 잘 정리해 놓으면 만사가 잘 정리될 것 같아서 일은 안 하고 서랍 정리부터 하는, 늘 있어왔던 일상의 습관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더 최근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 말대로, 나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 문학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 분노와 이기심과 질투, 선함과 연민, 어리석음과 지혜, 등으로 펼쳐진 인간성의 스펙트럼을 이미 볼 만큼 보고 알만큼 알지 않는가, 하는 생각. 그런 걸 다 알고 있는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결단과 실천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게 힘들어서, 또다시 작가의 세계관으로 도망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이건 분명히 정신적 게으름이라는 생각. "뭣이 중한지" 나는 실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내면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신과 천국은 물론 지옥과 땅과 생명과 죽음과 모든 역사가 우리 안에 있다. - 에티 힐레숨



내 밖의 세계는 내 안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세계관은 인간의 태초부터 있어왔던 것이고, 그러니 그건 창조가 아니라 발견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그를 위대하다고 하는 까닭은 아무나 그걸 알아보고 언어로 형상화하는 재주를 갖지 못하기 때문일 테다.


십만 원도 훌쩍 넘는 두껍고 무거운 한 권짜리 셰익스피어 전집을 사놨는데, 이걸 어쩌나. 셰익스피어 읽기라는 제목으로 브런치북부터 만들었더니 얼른 좋아요를 눌러주신 세 분의 작가님(꽃보다 여자님, 꿈 그리다 님, 크레마님)한테는 죄송해서 어쩌나. 죄송합니다, 작가님들! 경솔한 나여, 벌 받을지라!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어지간히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결론에 이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다시 출발하게 마련이다. 정선된 좋은 책을 읽자는 새로운 마음으로. 평생 한 권만 반복해서 읽어도 충분할 수 있는 시점을 독서의 굽이진 오솔길을 돌 때마다 만나길 바라는데, 지금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단 생각은 드는데, 여전히 마음은 갈급해서 셰익스피어 전집을 펼쳤다 덮었다 펼쳤다 덮었다 하고 있다. 전집 위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이 놓여있고, 그 옆 책장에는 네다섯 권의 책이 또 쌓여있고, 뒤편 책장에도 한때의 변덕으로 사놓은 '정선된 좋은' 책들이 꽂혀있다. 책들이 나를 보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낸다. 아우성의 내용은 너무 사적이라 적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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