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내게 두 애인 있노라, 하나는 위안이요, 하나는 절망이라,
그들은 두 요정인 양 항시 나를 유혹하도다.
천사는 수려한 남자요
악마는 살갗이 검은 여자라.
이 마녀는 나를 속히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나의 천사를 유혹하여 내 곁을 떠나게 하고,
내 성자를 악마로 타락시키려 하노라,
그의 순결을 그녀의 더러운 교만으로 꾀어서.
내 천사, 악마가 되었는지 의심할 뿐
명백히 말할 수는 없어라.
둘이서 정답게 내 곁을 떠났기에
하나가 다른 것의 지옥에 빠졌으리라.
잘은 알지 못하고 의심 속에 살고 있노라,
악마가 천사를 추방할 때까지.
- 피천득 옮김
144
내게 애인이 둘 있으니, 위안과 절망이오며,
두 요정인 듯 언제나 나에게 소곤거리노라.
더 나은 천사는 수려한 남자요,
더 나쁜 요정은 빛이 검은 여자라.
나를 바로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고 이 마녀는
더 나은 천사를 나로부터 떠나게 꼬시고,
나의 성자를 악마로 타락시키며,
그의 순수함을 그녀의 추악한 오만으로 치근거리니.
내 천사가 악마로 변하는지
의심은 할 수 있으나, 바로 말할 수는 없느니라.
그러나 둘은 나를 떠나 정답게 지내니,
짐작하건대 한쪽 천사가 다른 쪽 지옥에 빠졌으리라.
하지만 이를 알 수는 없으나, 의심하며 살리라,
나의 나쁜 천사가 나의 착한 천사를 불길로 쫓아내기까지.
- 신정옥 옮김
https://www.youtube.com/watch?v=V3VW7ReE_ac
144
Two loves I have of comfort and despair,
Which like two spirits do suggest me still;
The better angel is a man right fair,
The worser spirit a woman colored ill.
To win me soon to hell, my female evil
Tempteth my better angel from my side,
And would corrupt my saint to be a devil,
Wooing his purity with her foul pride,
And whether that my angel be turn'd fiend,
Suspect I may, yet not directly tell,
But being both from me, both to each friend,
I guess one angel in another's hell.
Yet this shall I ne'er know, but live a doubt,
Till my bad angel fire my good one out.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다분히 분개할 비유들이 나오지요. 천사는 수려한 남자로, 악마는 여성으로, 특히 살갗이 검다는 인종주의적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셰익스피어 역시 특정한 한 시대의 인물이었음을 감안하고 일단 이 부분은 넘어가기로 해요. 여기서는 단지 '두 애인'에 대해서만 집중해 볼까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는 마치 드라마처럼 서넛의 인물이 나오는데요, 이 시에서는 시인과 시인이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검은 여인이 있습니다. 소네트집에는 검은 여인이 등장하는 일련의 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걸 '검은 여인 소네트군'이라고 부른다는군요. 소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 누구였는가에 대해 학계에서는 여러 추측이 이루어졌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작중 인물이 실재하는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학자들이 왜 소네트 인물들의 실존 여부에 대해 집착했는지 의아해요. 그 점에서 박우수 번역자(소네트집)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박우수 번역자에 따르면, 이 인물들은 셰익스피어의 시적 가공물일 뿐입니다. 시의 화자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젊은이의 부정적 속성들을 검은 여인에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젊은이의 성적 방종과 정조 없음의 육화된 상징이다.(소네트집 p.179) 그리고 젊은이는 시인이 언어적으로 사랑을 재현하기 위해 만든 언어의 가공물이라는 거예요. 여기에 더해서 학자는 진실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언어의 한계와 그럼에도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시인의 딜레마에 대해서도 긴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 글들은 문제집 뒤편의 해답을 봐도 소용없는 고난도 수학문제 같아서 생략하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 144번이 중세 시인 프루덴티우스의 <영혼의 전쟁> 모티프를 빌린 것이라는 점이에요. 그렇다면 선한 천사인 젊은이와 악한 천사인 검은 여인은 둘 다 시인의 일부라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내 마음이 시시때때로 둘로 쪼개져 싸우는 걸 압니다. 선량한 마음과 나쁜 마음은 팽팽하게 겨룹니다. 나쁜 마음이 선량한 마음을 끌고 들어갈 때 시인의 말대로 '나'는 '지옥'에 빠지게 되죠. 우리는 영원히 의심하며 삽니다. 착한 천사가 나쁜 요정의 지옥 속에 있는지 아닌지를 반신반의하며,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내 마음을 따라서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요. 마음이든 세상일이든 간단치 않아서 선악의 이분법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지만, 가장 바닥으로 내려가보자면 이렇게 간단한 얘기일지도 모르죠.
셰익스피어는 굉장한 심리학자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굉장한 언어 천재지요. 언어는 사유를 이끌고, 사유는 다시 언어의 정교한 나침반에 의지해서 더 진전합니다.
검은 여인이 나오는 시 한 편을 더 읽어보세요. 나 그대를 사랑하여 그대의 추함조차 용납할 수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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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그렇게 검으면서도 횡포를 부리니,
미를 자랑삼는 잔인한 여인들과 같으니라.
그대를 지극히 사랑하는 내 마음이,
그대를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중한 보석으로 여김을 그대는 잘 알고 있으리라.
그대를 본 사람은 이렇게 성실히 말하노니.
그대의 얼굴은 애인을 신음하게 할 힘이 없노라.
나도 그들이 틀렸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으나
그래도 나 자신으로서는 그대가 미인이라고 맹세하리라.
나의 맹세가 분명히 거짓이 아니니,
그대 얼굴을 생각만 하여도 천 번의 신음을 하고
바로 연달아서 증언하노니,
그대의 까만 빛이 나의 판단에는 가장 아름다우니까.
그대는 행실 말고는 검지 않으니,
이런 중상은, 생각건대, 행실 때문이리라.
- 신정옥 옮김
* 대문 그림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천사와 악마> (1941)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