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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 관한 길 잃은 하염없는 생각들

by 스프링버드


밤새 눈이 내렸다. 전해 들은 말로는 군데군데 나무가 부러졌다고 한다. 이틀째 함박눈이 내렸고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 불평도 환호도 섣불리 못하겠다. 다만, 아직 단풍이 아름다운 나무에 흰 눈이 쌓여 이전에는 보지 못한 색다른 풍경이 눈을 홀린다는 것 정도는 말해도 용서가 되려나.


지난 겨울에는 세 달 정도 창밖에 새 모이를 내놓았더랬다. 겨울이 끝나고 봄 여름 가을이 지나는 동안, 그 일을 잊고 있다가 창밖의 한기에 문득 새들을 떠올렸다. 우리 집 창밖에 찾아왔던 작은 새와 큰 새들을 말이다. 그때 찾아왔던 박새류와 직박구리 그리고 까마귀들. 두 번 정도 날아온 까마귀는 무서웠고, 머리도 영리하고 덩치도 크니 다른 곳에서도 먹이를 잘 찾아먹을 수 있겠거니 생각해서, 미안하지만 쫓았다.


새들을 먹이면서 관찰을 하게 됐는데, 모르는 내 눈에도 자기들끼리 조심하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먼저 와 있으면 얌전히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박새처럼 작은 새는 좁쌀을 먹을 것 같지만 단연코 해바라기씨가 제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작은 두 발로 작은 해바라기씨를 꼭 쥐고서 여러 번을 쪼아 먹는다. 베란다 창에 걸어놓은 화분틀에 앉아서 톡톡톡톡 씨를 쪼고 있으면 화분틀까지 퉁퉁퉁퉁 작게 울린다. 박새보다 세배는 큰 직박구리는 씨앗을 쪼을 일은 없다.


눈이 푸지게 온 오늘 아침, 새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마침내 가게문을 열었다. 어제부터 밥을 굶었을 테니 배가 고플 텐데 작년의 그 집을 기억하고 찾아올지, 기억을 환기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리란 건 확신한다. 처음으로 먹이를 내놓았던 지난 겨울에도 손님들은 결국 왔으니까 말이다.



20층 아파트의 11층. 지상과 고립된 느낌을 주는 이 집에서 공중에서 날아오는 손님을 맞는다는 건 참 특별한 느낌이다. 3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모두 장난감 같았다. 도로의 작은 차들, 작은 모형 같은 사람들, 놀이터의 아이들 노는 소리조차 이곳까지 올라오지 못하는 이 모든 상황이 구체적 삶을 자꾸 추상적으로 만드는 것만 같았다. 이전에 살던 2층짜리 빌라에서는 사람도 가깝고 말소리도 가깝고 음식 냄새도 나무도 풀도 길도 모두 가까웠다.


무슨 생각으로 베란다에 새 모이통을 내놓을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 계기도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계기가 있었다면 내 깊은 무의식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복잡한 동네지만 아파트가 산을 바로 면하고 있다는 자연적 환경이 그 계기를 우연처럼 끌어내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창으로 찾아드는 새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정이 들었다. 많이 먹지도 않는 그들의 작은 배가 안쓰럽기도 하고, 씨앗을 먹고 우리처럼 물을 마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식구 아이가!" 하는 연대의식까지도 느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깊은 의식을 더듬어보면, 새에게서 찾는 또 다른 염원 같은 게 보인다. 말하자면, 자유에 대한 열망 같은 것. 그 자유란, 저 깨끗하고 넓은 하늘처럼 단순해지고 싶다는 마음과 닿아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외로워하는구나, 하는 것도 보게 된다. 다정하고 따뜻한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혈혈단신으로 세상과 절연하고 사는 게 아닌데도, 인간은 어떤 '관계'를 꿈꾼다.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결코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것을. 손에 잡는 순간, 망치게 되어있는 관계, 다만 꿈꾸는 관계라는 게 있지 싶다. 이런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아끼는 그림책이 있다.




루머 고든이라는 작가의 그림책인데, 아쉽게도 번역이 안 됐다. 내용은 간단해서, 소년이 산비둘기를 잡아서 어떤 독신녀의 집에 갖다 주는데, 새장에 갇힌 산비둘기는 밖을 그리워하며 모이도 물도 거부하며 병들어간다. 새장에서 먹이를 발견한 집쥐는 그걸 가지러 갔다가 비둘기로부터 바깥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둘은 친구가 되는데, 집쥐는 원래부터 특별한 구석이 있어서 다른 집쥐들과는 달리 창밖을 보기를 좋아했다. 집쥐는 새끼를 낳고 바빠서 한동안 비둘기를 만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비둘기를 찾아간다.


달빛 속에서 쥐는 날개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잠들어있는 새를 볼 수 있었다. 깃이 흐트러져서 비둘기는 통통하고 평화로워 보였지만, 아니었다, 쥐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새는 꿈을 꾸는지 잠결에 "구 구" 울며 마치 날듯이 몸을 떨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꿈을 꾸는구나." 쥐는 말했다. "가여운 것! 가여운 비둘기!"


쥐는 이빨로 손잡이를 열어서 새를 풀어준다. 비둘기는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날개를 펴고 새장에서 나와 곧장 열린 창문 밖으로 날아간다. 그리고는 위로, 위로 솟구쳐서 저 멀리 숲으로 날아간다.




흥미로운 건, 산비둘기는 남자, 쥐는 여자로 설정됐다는 점이다. 쥐의 이름은 마우스와이프, 즉 남편 쥐가 있다. 둘의 우정은 사실 애정일지도 모르지만, 애정은 깊은 연민을 위한 징검다리일 것이다. 남편쥐는 딱 쥐의 세계만을 아는 존재고 아내쥐에게 친절하지 않지만, 어쨌든 마우스와이프는 새끼를 '한 바구니'나 낳는다. 먹이를 구하려고 언제나 종종걸음을 치는 이 엄마쥐는 생활에 구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집쥐답지 않게' 창밖을 내다본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채.


쥐는 비둘기를 통해서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듣는다. 상상도 안 되는 너무 큰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도 쥐는 하늘을 난다는 걸 정확히 몰랐다. "난다는 게 뭐야?"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게 있다. 하지만 비둘기가 생명을 내놓을 만큼 아끼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비둘기에게 모이가 싫으면 물이라도 마시라고 하자 비둘기는 대답한다. "이슬, 이슬, 이슬."


비둘기가 밤하늘을 날아가는 걸 바라보며 쥐는 말한다. "그러니까 저게 나는 거구나. 이제 알았다." 쥐는 비둘기가 떠났으니 산과 옥수수와 구름에 대해 얘기해 줄 이가 없다는 게, 자신에게는 돌볼 아이들과 비둘기가 남기고 간 솜털 약간 밖에 없다는 게 슬퍼서 눈에 눈물이 좁쌀만큼 고였다. "쯧쯧!" 쥐는 눈을 깜박이며 눈물을 참아냈다. 그리고 다시 밖을 내다보는데, 그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별들.


이유도 모른 채 창밖을 아련히 내다보던 아주 작은 집쥐인 마우스와이프가 마침내 밤하늘 높이 빛나는 별을 바라보게 이끌어준 매개자는 새 혹은 새와의 우정이었다. 쥐는 새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새의 고통을 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생활로부터 더 높은 곳으로 비상시켜 주는 것은 결국 연민이라는 뜻일까.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별로 상징되는 지고함으로 우리를 이끄는 빛나는 긴 실.


하찮고 작은 집쥐의 삶이 갑자기 새의 공간만큼 확대되고 무한한 우주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행복하면서도 가슴이 조금 아프다. 집쥐가 별을 보는 것만큼이나 이 이야기는 내게서 멀고 불가능하다고 느껴서인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순간만큼은 나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마우스와이프가 된다.


창밖의 새 이야기를 하고, 그림책의 산비둘기로 넘어가서, 이제 이 길 잃은 이야기를 산만하게 마무리할 지점에 이르렀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에서 폴 오스터는 자신의 타자기에 대해 '나름대로의 기분과 욕구를 가지고 있어서 울적한 분노와 열광적인 기쁨을 표현하는' 존재처럼 느끼게 된 나머지 '금속으로 된 회색 몸체 안에 갇힌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도 들리는' 것만 같다고 쓰고 있다. 화가 친구가 그 타자기의 '영혼을 드러내게' 했다는 말도 아울러.


주말 동안 우리는 코네티컷에 와있다. 여름이다. 그리고 창문밖의 아침은 따갑고 푸르고 아름답다. 지금 타자기는 주방식탁 위에 있고 내 손은 그 타자기에 놓여있다. 한 글자 한 글자씩, 나는 그 타자기가 이런 단어들을 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기와 폴 오스터 자신이다. 손은 그저 도울뿐이고 단어들을 치는 건 타자기라는 이 경지는 그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물아일체를 보여주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에게도 그런 대상이 있지 싶다. 누구에게는 타자기일 테고, 누구에게는 자동차일 수도 있다. 돌아보니, 십육 년을 썼던 우리 집 차는 우리 아이들을 나와 같이 키웠던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니 나는 폴 오스터식으로 말해도 좋지 않을까. '나는 내 자동차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 걸 지켜보았다.' 물론 주로는 그 대상이 사람일 때가 많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길가의 풀이나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우리는 마음을 흠뻑 주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한 존재. 새가 있다. 특히 창밖에 찾아오는 그 작은 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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