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다는 것

드라마 <미지의 서울> 7화를 보고

by 김도비

드라마 <미지의 서울> 7화에 나오는 대사다.


“호수, 너는 그게 문제야. 그 이상한 결벽 때문에 선을 안 넘잖아. 다 알면서 입 꾹 다물고 지켜보는 거? 그거 배려 아니고 방관이야. (중략) 선 좀 넘어. 뒷짐 풀고 이유 묻고 설득을 해.”


드라마 속에서 이 말을 들은 호수는 세심하고 배려심이 깊은 인물이다. 호수는 많은 것을 눈치채고 알면서도 티내거나 말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바라보며 기다릴 뿐이다. 좋아하는 미지에게도, 변호사로 자신이 대리하는 김로사 할머니에게도.


이 대사를 듣고 드라마를 보는 중임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호수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선을 넘지 않고 묻지 않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선을 넘지 않으려던 마음보다 내 선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선을 넘지 않으니 아무도 선을 넘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면 방어적인 나의 태도가 누구에게도 선을 넘을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리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높은 성벽을 쌓고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나의 세계 안으로 발을 디디던 순간은 아주 생생하게 기억난다. 선을 넘던 순간.


그때 나는 퇴사와 아빠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큰 충격에 빠져있었다. 나가던 모임은 물론이고 친구들과도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때 모임의 친한 친구가 카톡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어 했으면서 왜 갑자기 모임에 나오지 않는 거냐고. 순간 내가 든 생각은 ‘짜증이 난다’였다.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 느낀 불편감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의 선을 넘으려고도, 나도 누군가의 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고 살아왔던 나에게는 처음 느끼는 생경함이었다. 순간 짜증이 났지만 사회적 호인의 가면을 빠르게 쓰고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고, 개인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보통은 이쯤에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한 발 물러서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이쯤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전화가 왔다. 카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는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매우 고민했지만 그가 아주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선은 받았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이유를 말하라고 다그쳤다. 그 기세에 회피형인 나는 별 수 없이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집안 사정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 전화를 끊고 나는 또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해방감이었다.


이유를 알게 된 친구는 나를 위로해주고, 모임에 나오지 않는 나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 주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그 모임에 아직까지도, 7년 넘게 잘 나가고 있다. 만약 그때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고 그만두었다면 모임도, 친구도 지금 나의 인생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경험은 이후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선을 넘을까 두려워하던 건 늘 나였다. 성벽을 높게 쌓고 있던 것도 나였다. 나의 높은 성벽은 바로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선을 넘던 그 순간의 해방감을 쫓게 되었다. 한 번 해방감을 맛본 뒤로는 성벽을 쌓는 일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고독보다는 자유가, 혼자 보다는 함께하는 게 좀 더 나았다. 성벽은 부서지려고 쌓는 거였고, 이미 쌓아둔 성벽이 한 가득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호수에게 이 말을 한 선배 변호사는 호수와 적대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좋은 의도로 말 한 건 아니겠지만 호수가 그런 식으로 관계를 쌓아온 것도 맞다. 조금은 용기없이, 조금은 순응적으로, 조금은 회피하며. 하지만 그런 태도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7화 말미에 호수는 오랫동안 좋아하던 미지에게 고백하며 이렇게 말한다. 영영 못 볼 바엔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아무 사이 아닌 채로, 가끔 제삿날 운 좋게 니 얼굴 보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고. 니 마음이 좀 더 편할 때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일 때 그때 제대로 해야겠다 싶어서 계속 참았었다고.


호수는 드디어 호수의 선 밖으로 나가 미지의 선 안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 것이다. 선을 넘는 것이 두려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회피하던 날들을 지나, 완벽한 순간을 바라던 합리화도 버리고 원하던 삶으로 나아갈 용기를 냈다. 신기하게도 누군가의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동시에 나의 선을 넘는 것이기도 하다. 선을 넘는다는 것은 나의 결핍으로부터 한 발짝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호수는 이 날 아주 많은 선을 넘었다.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라서 나는 여전히 성벽 안에서, 선 앞에서, 겁내고 두려워한다. 선을 넘는 한 번의 분명한 경험은 나에게 좋은 경험으로 남았지만 익숙함을 찾으려는 관성 또한 강력해서 여전히 나를 붙잡곤 한다. 호수처럼 단번에 많은 선을 넘고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인생의 모든 성벽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일이든 관계든 풀리지 않고 힘들 때면 생각한다.


아, 내가 선을 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구나. 또 어떤 벽을 부숴야겠구나.

이전 04화S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