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승무원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오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아온 나. 후회 없었다.
by
라즈베리맛젤리
May 10. 2020
다시 돌아온, 평범한 ‘나’라는 사람
# 짐 정리
나의 마지막 달 비행이라는 말에, 크류들의 공통질문이 하나 있었다.
그만두면 제일로 하고 싶은 것.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게 딱 하나 있었다.
아침에 새소리에 일어나 아침 먹고 누워서 티브이 보다가, 점심 먹고 누워있다가, 저녁 먹고 제시간에 자는 것.
내 기억에 의하면, 이 말에 비웃은 크류는 없었다.
매 끼니를 챙겨 먹고, 제시간에 잠을 잔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인 만큼.
그 누구도 왜 그게 하고 싶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1달은 그렇게 쉬는 게 나의 플랜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정말로 잠 만 잘 거야..!'
모든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유니폼을 반납해야 할 때.
사실 이때 가져가고 싶은 여벌의 유니폼 몇 벌은 미리 챙겨두었고,
대신 회사에는 벌금을 물었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유니폼인 만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었다.
꽤 오래 써서 낡고 헤진 모자였지만, 그래도 평생 간직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방을 빈틈없이 채웠던 나의 물건들을 이민 가방에 꾸겨넣기 시작했다.
'다시 가져가기는 애매한 밥솥과 전기장판은 팔아야 하는데...'
혹시 몰라 우리 숙소의 1층 게시판에 전기밥솥을 판매한다는 메모를 붙였더니
몇 시간도 안돼서 연락이 왔다.
'연락이 올 줄 모르고, 아직 세척해놓지 않았는데!'
금방 사러 오겠다는 말에 침대에서 쏜살같이 뛰쳐나와 헐레벌떡 깨끗이 닦아놓았다.
필리핀이나 태국크류일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을 열고 깜짝 놀란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 집에 찾아온 건 아프리칸 크류였다.
이유인즉슨, 한국 밥솥으로 한 밥맛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며, 너무 갖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소중히 품에 안고는 가버렸다.
'역시 한국 밥솥이 밥맛이 좋긴 하지..'
혼자 중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 한잔 값에 넘겨버린 밥솥을 보내버리고 나니, 뭔가가 허전했다.
나름 5년을 함께한 밥솥이었는데, 이렇게 후다닥 팔아버리다니.
이상한 죄책감과 함께 내가 정말로 이곳을 떠나는구나 하는 현실감이 이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밥솥 하나를 팔고는, 허탈함을 느끼며 텅 빈 내 방안을 바라봤다.
'와.. 나 진짜로 가는구나...'
그렇게 나는 이민가방 2개에 그동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는 남은 며칠 동안, 오프가 맞는 동기들을 더 많이 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모두 써버리고
내가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회사에서 받는 마지막 비행기표.
표를 받아서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동안 쉴 틈 없이 비행하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 냈던 탓인지
돌아가는 비행 내내 나는 이곳저곳이 쑤시기 시작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 어깨는 누가 짓누르는 것 같은지.
왜 갑자기 치통이 이렇게 느껴지는지.
거의 9시간의 비행 동안 나는 미치도록 피곤했고,
여기저기 앓으면서 돌아왔다.
'그래 그만두길 잘했어.'
그렇게 나는 후회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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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ch Book
승무원, 꿈만 이루면 돼
15
15. 그렇게 사직서를 내버렸다.
16
16. 나의 마지막 비행
17
17. 승무원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오다.
18
18. 여전히 나는 불안했다.
19
19. 어른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
승무원, 꿈만 이루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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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의 마지막 비행
18. 여전히 나는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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