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나의 마지막 비행

그렇게 나는 마지막 비행을 마쳤다.

by 라즈베리맛젤리



중동 승무원이 된 평범한 ‘나’라는 사람






#베니스 비행



내 비행 인생 중, 가장 좋은 마지막 달 스케줄을 받아버렸다.

'엥? 원래 사직서를 내고 나서, 마지막 달 스케줄은 최악이여만 하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정말로 하루하루가 아쉬울 정도였다.

그만두기도 아쉬울 정도..


우선 파리와 마드리드에서 데이 오프를 받았는데, 거의 2박 3일을 지내고 오는 패턴을 받았다.

우리 회사에서는 1박 이상을 받는다는 건 '우와' 할 정도인데. 그걸 한 달에 2개나 받다니. 입이 쩍 벌어졌다. ‘그만두지 말라는 신호인 건가? 이렇게 좋을 수가!’

거기에 더해서 내가 요청했던 베니스 비행이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내가 4년 넘게 비행하면서 받은 스케줄 중에서 제일 좋았다..

내가 이토록 열심히 비행간 적이 없었다.



비행이 허다한 일상이고 소중하지 않았던 그 전에는,

크류들과 말 한마디도 안 하고 비행을 마친 적도 있었다.

내일도 내일모레도 또 만날 새로운 크류들.

그 당시에는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일이라는 단순한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슬프게도 그때에는 이런 딜레마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달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나서,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크류들과 승객들에게 더욱더 많이 다가갔다.

브리핑룸에서도 나의 소개를 할 때도 항상 잊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달이며, 너희와 비행을 하는 것에 행복하다고..



이야기의 주제가 퇴직이 되어버리는 순간, 크류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시니어 크류들은 내가 맞이 할 미래에 대해서 함께 토론하기도 했으며, 본인들의 비행 만족도에 대한 이야기가 분수 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들 그만두고 싶지만, 용기가 없었던 크류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주니어 크류들은 왜 그만두냐며 토끼 같은 눈을 하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마치 내가 막 조이닝 했을 때의 모습도 교차되었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후회 없이 있다가 가는 것 같아. 너도 이 순간들 후회 없이 즐기고 가"

내 욕심에, 이제 막 비행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이야기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며, 5년 차가 되었으니.



그리고 나는 이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기에 비디오를 찍기 시작했다.

사직서를 작성하는 것부터 모든 비행 순간순간 생각날 때마다 녹화해댔다.

유니폼을 입고 핸드폰을 쓰는 게 어색했던 나였지만, 안면 몰수하고 꺼내서 찍기 시작했다.

우리 항공사는 핸드폰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만, 마지막 달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의 지나갈 추억들이 그렇게 틈틈이 영상으로 녹화되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베니스 비행.

함께 비행했던 한국인 언니와 함께 시티를 나갔다.

마지막 비행으로 베니스를 온 것 자체가 나에게는 감동이었다.

' 이렇게 낭만적인 곳이 내 마지막 비행이라니! 행복하다..! '



내가 승무원을 하면서 유일하게 모은 것이 있다면,

내가 직접 본 그곳의 풍경이나 모습들이 찍힌 엽서였다.

“언니 저 엽서 좀 잠깐 사고 가도 돼요?”

“나도 한 장 사야겠다. 골라줘!”

그렇게 우리는 사이좋게 한 장씩 사서 나왔다.


그리고 다음날 베니스에서 돌아오는 비행, 언니가 내손에 봉투 하나를 쥐어주었다.

어제 내가 언니에게 골라줬던 엽서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예요 언니?”

어리둥절했다. 처음 본 사이에 편지라니.. 마지막 비행이라는 말에

내가 골라준 엽서에 편지를 써서 주신 것이 아니던가....

언니는 퇴직을 축하하며 항상 잘될 거라는 말을 그 편지 안에 가득 담아주셨다.

이때 쑥스러워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고맙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또 마지막 비행에 이런 좋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게 너무나도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참 일을 하던 중, 또 다른 시니어 크류가 다가와서 뜬금없이 내 손을 잡았다.

'잉..?뭐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시크하게 나의 퇴직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아무도 없을 때 진지한 눈으로 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아프지 말고 항상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말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걸 크러쉬인 건가?...

언니의 편지 감동이 잔잔해질 무렵, 이 동료에 넘치는 감동을 한 번 더 받아버렸다.



착륙 후, 거의 찍어 본 적 없던 비행기 앞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항상 그만두는 다른 동료들을 위해서 찍어줬었는데, 이번엔 내가 찍어달라고 한국인 언니에게 부탁했다.

그리고는 다부진 자세로 한 장 찍었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비행이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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