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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맘 뤼 Nov 06. 2024

아이에게 물렸어요 (자폐스펙트럼 아이의 감정 조절)

자폐스펙트럼 아이의 감정 (2)

자폐스펙트럼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일까? 나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상호작용놀이 챌린지를 운영하며 많은 자폐 아이 양육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의 양육자들은 아이의 발달지연(특히 언어) 때문에 힘들어했다. 나 또한 그랬다. 처음엔 또래보다 느린 앨리스의 발달이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래서 앨리스가 걷지 못할 땐 걷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앨리스가 또래만큼 말하지 못할 땐 또래 수준으로 말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돌 이후의 앨리스는 또래만큼 잘 걷고 잘 말하는 아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와 치료 센터를 다니고 있었고 육아는 오히려 어려워졌다. 앨리스가 아기 때와는 달리 시도 때도 없이 분노를 폭발하거나 가끔은 양육자인 나를 때리고 깨무는 등의 공격적인 행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앨리스는 발달지연을 극복한 대신 감정 조절이 매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자폐스펙트럼 아이를 키우며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지금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아이의 감정 조절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폐스펙트럼의 범주에 있는 아이들은 감정 조절 능력이 매우 미숙해서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기관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발달지연이 없어서 조기에 진단을 받지 못한 일부 자폐스펙트럼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진단을 받지는 않았지만 자폐스펙트럼의 범주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이, 혹은 자폐스펙트럼 진단을 받았지만 완전통합수업을 받는 아이들을 다수 보았다. 그 아이들이 교실에서 보인 가장 큰 특징은 또래보다 학업 성취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래보다 감정 조절 능력이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앨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앨리스는 세 돌 이후 검사상으로는 발달지연이 없고 또래 수준의 학습을 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관 생활은 세 돌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렵다. 감정 변동의 폭이 너무 크고 인지 왜곡까지 있기 때문이다. 앨리스가 나를 깨물고 때렸던 이유도 사실 특정하기 어렵다. 앨리스가 어떤 이유에서든 내 행동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순간, 아이의 감정이 순식간에 요동치며 그 반작용으로 공격적인 행동이 나온다.     


물론 만 3세 ~ 5세의 아이들은 자폐 여부를 떠나 대부분 감정 조절이 미숙하다. 그래서 만 3 ~ 5세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의 감정 조절 능력은 어떻게 보면 또래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비자폐 아이들의 감정 조절 능력이 빠르게 발달하는 동안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들의 감정조절능력은 아주 천천히 발달한다. 초등학생이 된 자폐스펙트럼 아이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것을 그냥 방치하면 높은 확률로 공존질환(성격장애, 품행장애, 우울증 등)이 발생한다. 따라서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은 자폐스펙트럼 아이가 길러야 할 모든 능력 중에서 가장 우선인 능력으로 볼 수 있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꾸준한 지원(상담 및 교육)이 필요하다.      


(한편, 아이가 심각한 인지왜곡 현상과 공격성을 보이는 경우 역으로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의심해 볼 필요도 있다. 조기에 진단을 받지 못한 경우 근본적인 원인은 가려지고, 공존질환만 부각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의 문제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공존질환을 해결하는 것조차도 어려울 수 있다.) 

     

감정조절능력은 어떻게 기를까?

그렇다면 자폐스펙트럼 아이의 감정조절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진 아이들 마다 감정을 처리하는 특성이 매우 다르므로 이 글에서는 앨리스를 기준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앨리스는 자기 주도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 아이다. 때문에 어떤 일이든 자신이 결정해야만 하고 아무리 합리적인 일이라도 부모가 시켜서 하게 되면 반발한다. 또한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이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수용되지 않을 때에도 (비록 그것이 합리적 결정일지라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반발한다. 그리고 그 반발심이 일정 기간 누적되면 갑자기 분노폭발(텐트럼)을 하거나 심하면 멜트다운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여기서 아이의 분노폭발은 누적된 반발심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타인이 봤을 때는 아이의 감정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갑자기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사소한 일이더라도 아이의 의견이나 감정이 수용되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가 해달라는 것마다 다 yes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럴 때는 아이의 감정을 수용해 주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야 한다. 양육자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해줄 수는 없지만 아이의 감정은 모두 수용해 줄 수 있다. 이는 요새 유행하는 “감정 읽어주기”와 비슷한 것이지만, 결론적으로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사탕을 이미 먹었는데 또 사탕을 먹겠다고 요구하는 경우, 양육자는 아이의 감정을 충분히 수용하고 달래주는 데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리고 사탕은 또 먹을 수 없다는 거절의 말은 아주 짧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반대로 에너지를 쓰곤 한다.)      


물론 쉽지 않다. 하루에 한두 번 정도라면 기분 좋게 아이의 감정을 받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10분에 한 번씩 부모를 시험하려고 하는 앨리스에게 매번 감정을 수용해 주고 달래주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한 번 감정을 수용해 주는 데에는 상상 초월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이와 나의 행복을 위해 아이의 감정을 충분하게 수용하는 것은 공존질환의 발생과 악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확보가 된다면 아이의 감정을 100 퍼센트 수용해 줄 수 있도록 양육자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 (반대로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감정을 수용해 주기 어려우므로 빠르게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분노폭발(텐트럼)에 대처하는 방법

자폐스펙트럼 아이와 생활하다 보면 감정을 읽어줄 새도 없이 갑자기 아이가 분노를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 앨리스가 51개월일 때, 처음 방문한 놀이터에서 사다리가 있는 놀이기구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내려올 때는 다시 사다리로 내려오거나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거나 경사면의 끈을 잡고 내려오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앨리스는 미끄럼틀은 더럽다고 거부하고 사다리와 경사면은 너무 무섭다고 거부하였다. 결국 아이 아빠가 앨리스를 안고 경사면으로 함께 내려왔다. 그리고 놀이기구 밑으로 내려온 앨리스는  곧바로 분노폭발을 시작했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본인이 원하는 방법으로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게 어떤 방법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앨리스는 한번 분노폭발을 시작하면 주변의 말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공격성이 매우 높아진다. 다행히 우리는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있었기 때문에 앨리스를 자극하지 않으려 멀리서 아이를 지켜보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아이는 스스로 진정되었다.      


이처럼 아이가 분노폭발을 하기 전에 감정을 읽어줄 만한 사건도 없었고 감정을 읽어줄 타이밍도 없었다면 아이가 분노폭발을 시작했을 때 스스로 진정이 될 때까지 그냥 안전한 거리에서 지켜보는 것이 좋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갔다가 아이에게 맞기라도 하면 아이도 양육자도 서로 감정적으로 힘들다. 다만 아이가 진정이 되었다면 아이에게 비슷한 상황이 또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아이가 특정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분노 표현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아이가 분노를 폭발할 때 대부분의 경우는 아이 스스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잘 안 된 경우가 많다. 자신이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상황인지도 모른 채로 그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과 적절한 감정 조절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출 때까지는, 특정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야 하는 감정과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일일이 알려주어야 한다. (필요하면 감정을 조절하는데 도움을 주는 약물을 복용할 수도 있다. 약물 복용과 관련해서는 소아정신과 의사와 상의한다.)     


자폐스펙트럼아이의 감정은 매일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며 예측이 쉽지 않다. 아이가 나이를 먹고 학교에 가고 취업을 하는 등 인생의 큰 변곡점을 만날 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은 셀 수 없이 많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고 수용 가능한 범위에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감정조절능력과 긍정적인 정서를 키워주는 일은 양육자가 평생에 걸쳐서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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