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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Sep 08. 2023

제비꽃

어디선가 타전되는 위로.


그해 봄엔, 예상보다 오래 집을 떠나 있던 '남의 편'께서 아무래도 계속 ‘남'도 아니면서 남처럼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뒷마당엔 민들레와 제비꽃이 창궐했다. 잔디밭 관리는 그의 담당이었다.


나는 뭐든 자라는 것들은 다 그냥 두었다. 그러면서도 치사하게 편애했다. 민들레, 그 노란 화사함을 만만하게 좋아하다가도 멀리 가려고 동그랗게 몸을 마는 씨앗을 보면 불현듯 불길해서 두 손안에 가두고 목을 땄다. 그 사이 제비꽃은 은밀하게 마당가로, 풀도 잘 자라지 않는 가문비나무 아래로 퍼져나가며 연보랏빛 애교를 떨었다. 그래그래 너 예쁘다.


나중에는 여기저기 번진 제비꽃을 파다가 가문비나무 아래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모종을 하듯 다시 심었다. 그때, '지금 뭐 하는 거야?' 얕은 담장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내가 하고 있는 짓을 본 이웃집 코니는 혀를 끌끌 차며 걱정을 했다. 잔디밭으로 순식간에 퍼질 텐데 어쩌려고 그러냐면서.


코니는 들꽃은 무조건 잡초로 분류하는 동네에서 가드닝을 가장 잘하는 아줌마다. 그녀의 정원은 온갖 꽃과 나무들이 허락된 만큼의 제자리에서 자라고, 계절이 바뀌어야만 변화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늘 한결같은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 또 잔디밭은 어떻고.... 멀리서 보면 다 같은 푸른 잔디밭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잔디반, 잡초반인 우리 집과는 달리, 그녀의 잔디밭은 순도 99.9%의 잔디다. 아침마다 그녀는 자신의 잔디밭에 기생하려고 날아온 잡초들을 마치 핀셋으로 흰머리칼을 뽑듯 골라냈다.


미안, 니네 집 정원까진 안 번지게 할게. 그냥 이번 한 철만 모아두고 보고 싶어서 그래.


나를 위한 걱정 속에 숨긴 자신의 불안을 들킨 게 민망했는지, 아침에 스콘을 구웠다면서 자기 집으로 커피나 마시러 오라고 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잡초가(잡초라고 듣고 들꽃이라고 이해한다.) 얼마나 빠르게 잔디밭을 점령하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들으면서 아끼던 한국산 봉숭아 꽃씨를 뇌물로 상납하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아이들 주라며 싸준 스콘을 달랑달랑 들고 다시 내 혼란스러운 뒷마당으로 돌아왔다.


까짓 제비꽃쯤이야... 살면서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퍼져서 대책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괜한 심통을 부리듯 더 제비꽃을 싸고돈다. 요 예쁘고 귀여운 녀석이 말썽을 부려봤자 얼마나 큰 일이라고... 나는 편애하는 제비꽃과 한통속이 되어서 그 후로로 꽤 오래 그녀를 초조하게 했다.


그 봄, 민들레는 아무리 구박해도 늘 반항하고, 제비꽃은 당당하게 특혜를 누리며 살맛이 났고, 방심한 사이 첩자처럼 스며든 butter cup은 일시에 앞마당 양지바른 곳을 점령했다. 심신의 건강이 한꺼번에 바닥을 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봄이 지나는 동안 잔디도 쑥쑥 자랐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잔디밭은 도저히 더는 봐줄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뒷마당이 해우소였던 콩알만한 몸집의 유키는 매번 정글탐험대가 되어야 했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 너도 고생이다  요즘 산책도 자주 못 시켜 주는데.. . 그래, 깎자.


기계로는 절대로 깎을 수 없는 길이로 자란 잔디를 우선 가위로 자르느라 쉬엄쉬엄 아이와 함께 이틀을 엎어져 있었다. 잔디를 자르는 동안 다른 들꽃이나 풀은 여지없이 속아내면서도 제비꽃은 눈감아 줬다. 잔디 깍는 기계는 분명 고장 난 건 아닌데 도저히 시동을 걸 수 없었다. 힘이 모자랐다, 결국 모터 없는 수동을 사서 달달달 끌고 다닐 때도 일부러 날을 높게 조절해서 은근슬쩍 비켜가며 제비꽃을 모셨다.


제비꽃을 향한 나의 이 지독한, 터무니없는 편애는 그 노래 때문이다. 몰랐어도 좋았을 것들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알게 되어 휘청거렸고, 그 휘청거림마저 바닷속에 수장시키고 싶었던 날들이 길었지만, 바다는 언제나 조용히 나를 돌려세워 보냈다. 지독하게 슬프면서도 참 예뻤던 갓스물이었다. 그때 이 노래가 문신처럼 박혔다. 누군가로부터 타전되는 위로였고 공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다행이다.


심약한 추억을 자르 듯, 호미를 들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한국에 다녀온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호미의 기능성에 탄복하면서 코니가 잡초로 분류한 것들을 뽑아냈다. 민들레 어린싹과 질경이를 캘 때는 이걸 무쳐먹을까 말까 궁리하느라 제법 조심스레 따로 챙기면서도 제비꽃은 함부로 뽑아냈다.

꽃은 다 져서 없었지만 그 사이 얼마나 맘 놓고 자랐는지 잎이 실해서 제법 화초다운 면모까지 보였다. 옆으로 번져가는 생명력으로 보면 민들레처럼 뿌리가 깊고 질길 것 같았는데 의외로 뿌리는 얕아서 쉽게 뽑혔다. 다 뽑지도 못했는데 금세 수북하게 쌓였다. 아꼈으므로 아까웠지만, 뽑고 나니 질긴 미련을 버린 듯 속이 시원했다. 허전할 것 같던 빈자리가 오히려 고요했다.


미안.

억울하지? 하필 네가 걸렸어. 내 모진 감정이입에. 굳이 변명하자면 너, 들꽃이잖아. 들에서 살아야지 왜 잔디마당으로 들어온 거야. 괜찮다고 하지 않았냐고? 누군들 속엣말 다 하고 사는 줄 알아? 너도 알았잖아. 결국엔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그 제자리가 누추하고 외로워서 달아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어. 돌아가 보면 얼마나 방황했고 얼마나 간절했고 얼마나 애가 탔는지, 그런 거 다 시시해질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왜냐면 그런 건 삶의 근원이 아니라 그저 현상이기 때문이야. 어쩌면 이 세상을 지탱해 주는 건, 바꾸고 싶은데 바꿀 수 없는 것들의 눈물인지도 몰라.


수북하게 쌓여있는 뽑힌 제비꽃 위에 꽤 길었던 감정의 방황도 함께 얹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제비꽃'이 아니라 그저 마당에서 뽑혀나가는 잡초일 뿐인 제비꽃을, 분리수거할 때 쓰는 '야드 트리밍'통에 넣고 돌아서는데 그 노래, 다시 날아와 가슴 안 쪽에 조용히 앉는다. 이젠 눈물 나지 않게, 그저 노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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