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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ug 03. 2022

옛집에 두고 온 더덕꽃

더덕꽃을 처음 보았네.



이사 준비를 하는 중에도 생각이 날 때마다 뒷마당의 더덕 앞을 서성거렸다. 집을 팔았으니 원래 있던 것들은 마당의 화초 한 포기까지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유독 막 꽃이 피기 시작하는 더덕 때문에 생각을 몇 번 뒤집었다. 집을 산 사람에게 연락해서 허락을 구하면 굳이 거절하진 않을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결국은 그대로 두고 이사를 나왔다. 이사 갈 집에 편하게 옮겨 심을만할 넉넉한 땅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옮기다가 오히려 죽을까 봐 걱정도 됐고, 무엇보다도 집수리를 하고 오픈 하우스를 거쳐 집을 파는 과정에서 지칠 대로 지쳐서 더덕 몇 뿌리 옮겨 심는 것도 성가셨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아마 앞으로 더덕을 다시 키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당에서 직접 키운 채소 한 잎이 주는 기쁨, 더구나 이곳에선 쉽게 구할 수 없는 한국 채소를 키우고 먹을 때의 즐거움은 다분히 유혹적이지만 나는 여느 한인 이웃들과는 달리 여전히 그런 일에 소극적이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우연히 더덕을 키우게 되었는지 떠올리며 남아있는 사진 몇 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다만 이사 직후엔 가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했다. 새 집주인인 젊은 중국인 부부가 더덕꽃을 좋아할까? 혹시 이상하다고 뽑아버리진 않았을까? 땅 속에서 수를 늘리며 자라고 있을 더덕 뿌리를 먹을 줄은 더욱 모르겠지? 그냥 두었다면 지금쯤 또 싹이 나고 있을 텐데... 그냥 가져올 것 그랬나... 하지만 사실은 정말 두고 온 걸 후회해서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그 더덕꽃이 떠오르면 바로 엄마가 생각났고, 그럴 때면 엄마는 내가 바라던 평범한 엄마로 아주 짧게나마 머물러주었 때문이다.


어느 해 이른 봄에, 한국에 계신 엄마가 아주 큰 박스의 소포를 보내주셨다. 이민 13년 만에 받는 소포였다. 존재보다는 부재에 익숙한 엄마였지만 그 소포 하나로 무심했던 세월이 흩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보낸 소포 안에는 여러 가지 말린 나물, 멸치, 미역, 고춧가루 등과 함께 축축해진 신문지에 싸여서 온 더덕이 있었다. 다른 것들은 포장을 열기 전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더덕은 의외라서 더 반가웠다. 그날 저녁 반찬을 위해 더덕의 껍질을 벗기면서 더덕향도 예전 같진 않다는 걸 알았다. 내가 변한 걸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귀찮아했을 끈적거리는 진액조차도 전혀 성가시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새댁이었을 때, 시어머니께서 주신 더덕의 껍질을 벗기면서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껍질을 벗기는 내내, 그동안 즐겨 먹으며 좋아했던 더덕구이가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친 음식이었다는 것도 새삼스레 알게 되었고, 한 편으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니 차라리 안 먹고 말겠다는 심통도 부렸다가, 그래도 나보다 더 더덕구이를 좋아하는 남편과 실한 것으로만 골라주신 시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더덕을 손질했다. 그땐 유난히 끈적한 진액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엄마가 보내주신 더덕의 껍질을 벗기고 나니 저절로 그다음 단계가 생각이 났다. 나무로 된 방망이 대신 베이킹을 할 때 쓰는 밀대로 두드려서 납작하고 포실하게 만든 후, 양념고추장에 재웠다가 프라이팬에 구워서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손질할 때 윗부분이 조금 수상한 더덕이 세 뿌리 있어서 따로 두었는데 아무래도 신문지에 싸여 태평양을 건너오는 동안 축축해진 신문지 덕분에 싹이 날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설마 싹이 날까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그래도 뒤란의 빈 땅에 더덕 세 뿌리를 묻었다. 바람은 간절했지만 그리 큰 기대를 하진 않았는데 정말 싹이 올라왔다. 아주 예쁘게.

사실 더덕구이를 먹으면서도 한 번도 잎이나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더덕은 그저 맛있는 반찬인 '더덕구이'였다. 그런데 새삼 쌀알만 한 싹이 나려는 더덕 뿌리를 보니까 이걸 키워서 잎과 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어쩌면 한 가지라도 더 새로운 것을 우려내서 엄마로부터 받은 소포의 가치를 높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더덕은 잘 자랐다.

놀랍도록 빠르지도 지루할 만큼 느리지도 않게, 내가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연둣빛 이파리를 키워냈다. 돌담으로 쌓아 올려서 만든 화단이라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자주 찾았는데 근처에만 가도 제법 알싸한 더덕향이 났다. 정말 그 어떤 꽃 향기보다도 기분이 좋은 향기였다. 더덕 향은, 낯선 듯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익숙한, 그런 향기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심을 조금 부리다 실수를 했다. 겨우 시원찮은 세 뿌리를, 그것도 화단 구석에 심고는 자라 봐야 얼마나 자랄까 싶어서 가느다란 대나무 꼬챙이만 하나씩 꽂아두었는데, 어느 날부터 정신없이 휘감으며 잎을 피워 올리길래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튼튼하고 큰 지지대를 만들어 세워주면서 더덕을 담장 가까이로 옮겼다. 그런데 옮긴 후부터 비실비실 하더니 꽤 자란 덩굴 세 개가 시들어 말라버렸다. 야산에서 저절로 자라는 식물이고, 신문지에 싸여 짐칸에서 여러 날을 보내고도 싹을 틔울 정도로 강하니까 이 정도 변화에는 끄떡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쩌면 무척 예민하고 정원의 화초처럼 옮겨도 괜찮은 시기가 따로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미안하고 속상했다. 남아있는 한 뿌리만이라도 잘 자라 주었으면 하고 자주 들여다보았는데 잎이 더 자라지는 않고 짙고 두꺼워지기만 해서 애를 태우더니 어느 날 뜻밖의 탄성처럼 꽃망울이 맺혔다. 다행히 죽은 줄 알았던 다른 한 뿌리에서도 새 순이 돋아나 덩쿨손을 감으며 자라기 시작했다.


날마다 내 감탄사를 햇살처럼 받으며 새 순을 밀어 올린 때가 4월 말쯤이었는데 여름내 덩굴을 지으며 잘 자라더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은은한 종소리 같은 더덕꽃을 난생처음 보았다. 모양도 빛깔도 품위 있는 꽃이었다. 날마다 뒷마당에 나가 더덕꽃을 들여다보는 게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다. 그렇게 삼 년, 우리는 눈이 맞아 즐거웠다.


어쩌면 앞으로 나는 더덕꽃을 볼 일이 아예 없을 수도 있고, 그러면 단지 사진 몇 장으로 남은 추억이 되겠지만 혹시라도 더덕꽃을 다시 보게 된다면 아릿하게 그 옛집과 엄마가 떠오를 것이다.



옛집에 두고 온 더덕꽃 자라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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