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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Sep 13. 2023

헌터의 친구들

낮술 @parkside brewery


#해미


9월이 시작되면서 가끔씩 비가 오기도 하더니 기온도 많이 내려갔다. 이제 곧 우기가 시작될 거라는 조짐으로 흐린 날이 많고, 햇살 좋은 날에도 그늘에선 여름옷으론 춥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쾌적한 날씨인데 지난 주말엔 며칠 만에 햇살이 화사했다. 마치 남아있는 여름을 싹싹 긁어모아서 마지막 잔치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밴쿠버에 온 '비키'가 강아지들도 갈 수 있는 곳이라며 다 데리고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낮술 마시기 좋은 날씨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맥주 양조장, Parkside Brewery. '록키 포인트' 공원 바로 옆이라 붙인 이름 같다. 록키 포인트는 안 간지 꽤 되긴 했지만 한때는 아침 산책을 자주 갈 만큼 좋아하던 곳이라서 이 맥주 양조장도 몇 번쯤 지나치면서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음주가무를 즐길 줄 모르는 좀 슴슴한 사람이라서 가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기서 낮술이라니... 이렇게 된 김에 이제부터라도 인생관을 좀 바꿔볼까 하는데... 될까?



'비키'는 얼마 전에 '밴쿠버 아일랜드'로 이사를 갔는데, 두고 간 집 정리도 할 겸 ‘Ed Sheeran‘의 밴쿠버 공연을 보려고 나온 김에 만나자는 것이었다.(아니, 공연을 보러 나온 김에 집 정리를 하는 거라고 했지.ㅎ) 나는 공연은 못 갔지만 워낙 좋아하는 가수라서 한동안 출근길마다 무한 반복으로 듣던 supermarket flowers를 흥얼거리며 헌터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사실은 살짝 걱정스럽긴 했다. 공원을 제외하고 이런 장소에 헌터와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낯선 사람들이 가까이 앉아있고 서로 대화를 하느라 시끌벅적할 텐데 괜찮을까?


작년에 처음 밴쿠버에 왔을 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해서 이젠 트라우마를 거의 다 극복한 것 같아 기특하면서도 구출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으니, 헌터가 '이젠 괜찮다'라고 말을 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일단 부딪쳐서 하나씩 극복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될 수 있으면 새로운 환경을 자주 만나게 해주려고 한다.


사실 '해미'는 거리가 멀어서 자주 볼 순 없지만 밴쿠버에서 만난 헌터의 첫 친구다. 밴쿠버에 온 지 2주쯤 되었을 때, 하두 무서워하는 게 많아서 어떻게 헌터를 보살펴야 할지 조금 헤매고 있을 때였는데, 비키가 록키 포인트에 강아지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 있다면서 함께 가자고 해서 만났었다.


밴쿠버 온 지 2주쯤 되었을 때


혹시라도 서로 싸우거나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같이 차도 타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기러기 똥을 얼굴에 묻히면서 놀기도 했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 혼자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가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아직 어린 개 두 마리가 만났는데 분위기가 비현실적으로 평화롭다 싶으면서도 헌터가 워낙 순하고 숫기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이웃에 사는 '루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그야말로 좋아 죽고 못 산다) 해미와 헌터는 꽤 시크한 사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관심이 없거나 성향이 달라서 같이 노는 게 그리 재밌지 않았던 거다. 개들도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도 싸우진 않으니 그럼 된 거야. 그렇지?


헌터는 추정나이 2살 반, 해미는 첫 번째 생일을 일주일 남겨두었을 때다. 지금과 비교하니 정말 강아지였네.

일 년 동안 폭풍성장, 이제 2살이 된 해미, 지금 눈으로 욕하는 중.


해미(Hemmy)는 두 살 된, '미니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다. 해미는 브리더를 통해서 비키에게 온 나름 족보 있는 녀석이다. 아마도 강아지 세계에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은 다 갖고 있고, 다 해봤을 것이다. 게다가 가방끈도 길다, 고집 세고 꽤 말썽을 피웠던 강아지 시절에 정기적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래선지 이제는 아주 의젓하고 똑똑하다.

간식을 주면 ‘오~케이’라고 말할 때까지 안 먹고 기다리는데 그걸 또 호모사피엔스들은 놀려 먹는다.

오~ 카나간.

오~ 클라호마,

오~ 레오’

등등으로 장난을 쳐도 해미는 절대로 안 속는다.

그런데 그럴 때 표정을 보면 마치, '음식 가지고 장난하지 마라 말이다!'라고 야단치는 것 같다.

사진 속의 해미, 눈으로 욕하는 중.ㅎ


가방끈이 짧은 정도가 아니라 전혀 없는, 조금 폼나게 말하면 '홈 스쿨링'이 전부인 우리 헌터는 간식 줄 때 ‘ sit, paw, down, up ’을 시키는 대로 하긴 하는데 너무 먹고 싶은 간식일 때는 시키기도 전에 네 가지를 세트로 후다닥 해치우고 빙구 미소를 지으며 애절한 눈빛으로 간식을 쳐다본다. 해미보다 덜 똑똑하긴 해도 생존본능 면에서는 헌터가 훨씬 많은 스킬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게다가 우리 헌터는 이중 언어 이해 능력견이다. ㅎ)



어이구~ 좋아용~ ㅎ


걱정과는 달리 헌터는 이날 하루를 제대로 즐겼다. 하긴 얼마 전부터는 무조건 피하기만 하던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가기도 하고, 몇 번 만난 사람들을 먼저 기억하고 반기기도 해서 많이 변한 줄은 알았지만, 이런 곳에서도 이렇게 햇살과 바람을 즐기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걸 보니 뿌듯하다.


해미가 간식 앞에서 승질 죽이며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시고르자브종은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마냥 좋단다.(나중엔 거의 누워있다가 불러도 고개만 까딱 돌렸다.) 누가 이마만 문질러 줘도 행복해서 눈이 감기고 귀가 다 넘어간다. 근데 헌터야, 너 꼭 술 취한 대머리 총각 같다. ㅎ




어떤 사람들은 구월 첫 주 월요일인 노동절(Labour day) 연휴를 마침표 삼아 이제 파티오 시즌은 다 끝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땡볕을 즐기는 사람들의 얘기고 우리는 한여름의 야외 테이블보다는 이맘때를 더 좋아한다. 휴가나 휴식을 원래의 의미처럼 즐기기엔 '비수기'만 한 성수기가 없다.

맥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기도 하겠지만 나는, 맥주는 수제 맥주(craft beer)보다는 대기업 맛이 좋다. 여전히 맥주는 '삿포로'와 '하이네켄'이다. 하지만 헌터가 아주 잘 놀아서 좋고, 술이 있어 더 좋았던 휴일 오후의 한가로움... 이 맛에 낮술 하나?


#헌터의 다른 친구들

그동안 헌터의 사회생활을 위해서 가기 시작해던 개공원에서 만난 친구들이 꽤 있었지만 헌터가 그리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너무 순해서 모든 개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어서 우리의 유치함을 들키기 싫어서 점점 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처음 몇 달은 잘 놀았다.

헌터의 첫 여자친구(비록 헌터가 차였지만..) 이브, 공만 보면 물고 와서 던져달라는, 그래서 집에 공이 꽤 많지만 견주는 한 번도 사준 적이 없다는 부르스와 스스로 왕따처럼 혼자 놀다가 엉뚱한 짓을 잘해서 야단을 맞으며 집에 가 있으라고 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터덜터덜 혼자 집에 돌아가는 쿠퍼(집이 얕은 담을 경계로 공원의 잔디밭과 연결되어 있는 강아지에겐 최적의 집이다), 젊은 중국인 부부와 함께 사는 한국에서 입양한 하얀 진도견 자매, 그야말로 지랄배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버터와 시네먼, (견주는 한 수 위다. ㅎ)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서 이름이 '홀리'인 사교적이진 않지만 정말 멋진 '홀리', 그리고 동네 산책할 때면 자주 만나 인사하는 개들도 대여섯 마리쯤 된다. 모두 따로 만날만큼 그리 친한 친구들은 아니지만 만나면 반가운, 헌터가 강아지들 사회에도 그런대로 잘 적응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게 하는 친구들이다. 


그리고 루시


한국에서 임보나 입양을 온 강아지들은 조그만 태극기가 박혀있는 목줄과 함께 온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그 태극기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자기도 한국에서 유기견을 입양해서 키우고 있노라고. 헌터보다 두세 달쯤 일찍 온 까만 진도믹스였다. 겉보기엔 진도가 섞인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고 했고, 강아지를 낳아본 경험도 있는 개였다. 처음 인사할 때 영어로 했지만 짐작대로 견주는 젊은 한국인 부부였다. 


희한하게도 오가며 로비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헌터의 반응이 다른 개를 대할 때와는 좀 달랐다. 경계하는 빛도 없이 반갑다는 신호를 꼬리로는 모자라서 온몸으로 나타내며 특유의 빙구미를 뽐냈다. 헌터보다 훨씬 겁이 많고 산책마저도 수월하지 못했던 루시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이 같은 나라에서 오고 비슷한 처지였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천둥번개가 친 후엔 며칠 동안 무서워서 산책을 못하고 있다는 루시를 만난 날은 루시가 하윤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그러다 루시를 일주일정도 봐주게 되었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는데 강아지를 무척 어려워하는 분이라서 함께 지낼 수 없을 것 같은데 몇 번 맡겼던 데이케어에서는 부탁한 대로 돌보지 않았는지 루시가 배탈이 난 적이 있었다며 걱정했다. 헌터에게도 좋은 경험이겠다 싶어서 하윤은 덜컥 승낙을 했는데 내가 보기에 이건 뭐.. 거의 전쟁터였다. 아니, 하윤과 두 녀석에게는 놀이동산이었는데 내 눈에만 전쟁터로 보였다는 게 맞는 말이겠다.


쟤들은 왜 저러고 놀아? 정말 싸우는 거 아니야? 저러다 다치는 거 아니야? 내 걱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처음 만난 두 시간 정도는 나는 겁이 나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두 시간은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마다 계속되었고 오후에 한두 번씩 짧지만 여전히 격하게 놀았다. 정말 왜 저렇게 격렬하게 노는지 다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가만 보면 루시보다 헌터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기 침대로 쓰는 소파도 내주고 저는 바닥에 누워 자면서도 좋다고 하고 간식도 나눠먹고 밥과 물은 아예 그릇을 바꿔 먹었다. 그 후로도 서너 번 더 루시는 우리 집에 왔고 헌터도 이틀을 루시집에서 지낸 적이 있다. 어쩌다 로비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냄새를 맡으며 흥분하는 헌터를 보면 아마 좀 전에 루시가 탔었나 보다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루시와 잘 노는 헌터를 보면서 하윤이가 한 마디 했다. 역시 개는 두 마리를 키우는 게 애들 정서에 좋아.


그러기만 해. 

나, 

집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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