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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Sep 29. 2023

비가 와도 걷는다.

여기는 레인쿠버


밴쿠버의 구월은 '우기'를 알리러 온 전령처럼 몰려드는 넓고 얇은 구름으로 시작된다. 순도 높은 햇살을 품고 푸르게만 깊어가던 하늘에 회색빛 균열이 생기고 비 오는 날들이 잦아진다.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우기는 아니라서 빗물은 가볍다. 하루동안의 날씨 변화가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빗물에는 땅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해갈된다. 여름이 길었다.


단풍과 우기가 거의 동시에 시작되어서 동부 쪽처럼 화려하면서도 맑은 가을 풍경은 볼 수 없지만, 가을이 여전히 좋은 이유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다.


이민 초기에 만났던  영어 선생님 제임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밴쿠버에서 살고 있는데 비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를 포함한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한국의 장마 같은 비교군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비가 와도 습하지 않다는 건, 마치 나 혼자 알고 있는 비밀처럼 은밀한 쾌적함이 되었다. 그런데, 이젠 나도 예전만큼 무작정 비를 좋아할 수는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헌터가, 비를 싫어한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이, 가장, 어쩌면 유일하게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비뿐만 아니라 물 자체를 싫어한다. 고층 빌딩에 사니 비 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귀신같이 알아채고 나갈 시간이 되어도 뭉그적 거린다. 평소엔 새벽마다 제일 먼저 일어나 아이와 내 방 사이를 자박자박 걸어 다니며 알람보다 먼저 잠을 깨우는 녀석이다. 하지만 산책보다도 해우소에 가야 하니 무조건 데리고 나간다.


일층 로비에서 나오면 넓은 처마가 있어서 바로 비를 맞진 않는다. 비가 온다는 걸 잊게 하려고 신나는 척하며 함께 뛰어가자고 유도를 하면 따라오는 듯하다가도 딱 처마 끝부분에서 멈추고 암팡진 엉덩이를 깔고 앉는다. 마치 비 오는 날이 너무 좋아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옛 생각에 잠기거나 명상을 하는 것 같은 자세로 고요하고 품위 있게 앉아있다.


도리 없이 전혀 품위 있지도 고요하지도 앉은, 다만 잠에서 덜 깼을 뿐인 자세로 헌터 옆에 서 있는다. 헌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오줌이 마려워서 뛰쳐나가길 바라며... 하지만 헌터는 지나치게 융통성이 좋은 방광을 갖고 있는지 좀처럼 이런 일은 없다. 다시 집으로 올라왔다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내려갈 때도 있는데 운이 좋으면 잠깐 비가 그칠 때도 있다. 이렇게 고집 쓰다가 하윤의 출근 시간 때문에 더는 기다려 줄 수가 없어서 새벽 산책을 포기할 때도 있었다.


가끔 멋진 비옷을 입고 산책하는 개들을 본다. 헌터도 비옷을 입으면 괜찮을지 모른단 생각으로 비옷을 사려다 그만둔다. 한겨울에도 맨몸으로 눈밭을 구르는 녀석이니 답답하고 불편할 게 뻔하고, 생각해 보니 헌터는 몸이 젖는 것보다도 우선 발바닥에 물이 닿는 걸 싫어했다.

맑은 날에도 어쩌다 조그만 물웅덩이를 만나도 살짝 건너뛰거나 옆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여름에 이슬이나 스프링클러 때문에 젖어있는 잔디밭에도 안 들어간다. 그러면서도 초겨울에 서리가 내린 잔디밭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눈이라도 쌓이면 바로 유토피아 입장이니 구별하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 녹으면 똑같은 물인데 왜 반응이 다를까? 온도나 촉감 차이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


이런 상황이니 목욕이야 말해 뭐 하겠는가. 집 근처에 있는 펫 스토아에 개를 목욕시킬 수 있는 시설이 있어서 사용해보고 싶으면서도 혹시 싫어할까 봐 미루고 있었는데 어차피 헌터는 그쪽으론 아예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젠 집 근처의 길들은 거의 다 다니는데 이곳만 아직 극복을 못하고 있다. 뭔가 싫은 게 있거나 좋지 않은 기억이 있나 보다.


예전에 유키를 키울 때는 집에서 2주에 한 번씩 목욕을 시켰다. 내 담당이었다. 한 손으로도 달랑 들 수 있을 만큼 작은 녀석이라 차고에 달린 속이 좀 깊은 싱크대가 유키의 전용목욕탕이었다. 하지만 헌터는 우리 욕조도 꽉 찬다. 게다가 샤워기로 목욕시키는 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꿈일 것 같다. 샤워기를 틀면 얘가 공중부양을 한다, 그래서 버킷에 담은 물을 조금씩 떠서 씻기는데 가끔씩 우당탕탕 소리도 난다. 저래서 무슨 목욕이 될까 싶은데 그것도 목욕이라고 씻고 나오면 뽀얗고 보들보들하다.(아무래도 우리 눈에 콩깍지가 씐 듯.. ㅎ) 그런데 뒤따라 나오는 하윤을 보면 누가 누구를 목욕시켰다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입은 옷은 다 젖어있고 얼굴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표정이다. 목욕을 시킨 거냐 수중전으로 한 판 붙은 거냐.


다행히 헌터는 무척 깔끔하다. 비록 순수 혈통은 아니지만 진도견이 그렇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목욕을 시키는데 더 늦어져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고 털만 빗겨놔도 반지르르 뽀송뽀송하다. 보기와는 달리 털이 보드랍다. 강아지 냄새의 주원인이라는 귓속도 깨끗하고 눈곱도 별로 끼지 않는다. 물을 싫어하니 안 씻어도 깨끗한 쪽으로 진화를 할 걸까? 암튼 다행이다. 이걸로 위로받는다. 털 때문에 하루에 두세 번씩 청소기를 돌리고, 돌돌이를 호신용처럼 가까이 두고 살아야 하는, 내 조기 은퇴의 to do list에는 없었던 고단함을.  


해도, 헌터 너는 아무 잘못 없다.  모두 내 결벽증 탓이란다. 너도 지금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의성이 없는 잘못이나 바꿀 수 없는 불편에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란다.


헌터에겐 첫 우기였던 작년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나아졌다. 비를 바라보며 버티는 시간도 줄었고 일단 산책을 시작하면 자주 털긴 해도 참고 잘 걷는다. 아무리 싫어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배운 거면 좋겠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엔 아무래도 산책 시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책에서 돌아오면 집안에서 한참 공놀이를 하고, 도돌도돌한 매트(lick mat)에 그릭 요거트와 땅콩버터를 발라서 준다. 빨아먹느라 피곤해서 잘 자라고.  


중대형견들의 적당한 수면 시간은 16~18시간이라고 한다. 좀 많다고 생각했는데 깨어있을 때 워낙 모든 감각이 초집중 상태이니 그 정도는 자야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나 보다. 그래선지 헌터도 평소에 잠을 많이 자는 편인데 특히 비 오는 날엔 더 잘 잔다. 비를 싫어하면서도 비오는 날의 아늑한 분위기는 좋아하니 다행이다. 폭신한 침대에 푹 파묻혀서 온몸에 힘을 다 빼고 옆으로 누워 자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방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모습이 예뻐서 슬쩍 쓰다듬어 주면 눈을 뜨고 확인한 다음에 한숨까지 내쉬며 다시 더 깊은 잠에 빠진다. 그 한숨소리는, 듣는 우리까지 평화롭게 만든다.

   


헌터가 좋아하는 비 오는 날의 포근한 낮잠을 '비 오는 날의 막걸리와 빈대떡'으로 응수하고 싶지만, 별게 다 귀한 나라에서 살다 보니 오래전에 포기한 로망일 뿐, 늘 사용하는 캡슐이나 핸드드립 대신 모카포트에 커피를 눌러 담는다. '보글보글' 커피 끓는 소리가 나면 금세 커피 향이 온 집안에 퍼진다. 맛보다 향을 위해, 향보다 소리를 위해 커피를 끓이는 날도 비 오는 날이다.


나는 여전히 비를 좋아하고, 헌터는 여전히 비를 싫어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변한 것 같다. 창밖을 내다보며 예전과 똑같이 '비 오네'라고 말하지만 전에는 완전한 반가움이었다면 지금은 잔걱정이 그 반가움을 주춤거리게 한다. 비록 헌터의 불편을 해결해 줄 순 없지만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는 마음만으로도 다정한 유대감이 생긴다고 믿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면, 때론 취향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상대방을 위해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다. 나는, 상대가 좋아하는 선물을 해주는 것보다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속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구월이 지나면 곧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될 것이다. 헌터가 작년 이맘때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체념이든 뭐든 우기에 잘 적응했으면 좋겠다... 고 쓰다가 혼자 웃는다. 헌터가 무슨 재주로 내 말을 알아듣겠냐마는,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다. 어쩌면 한국에서 데려오기 전에 해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랬다면 우린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후회하진 않는다. 헌터야~ 내가. 다시 말하는데...


사실 여긴 밴쿠버가 아니고, 레인쿠버( Rain+Vancouver)라고 불리는 곳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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