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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Sep 27. 2023

늘 바쁜 수선집

똥손이지만 최선을 다합니다.


아침 산책 때마다 청설모 때문에 두세 번씩 급발진으로 뛰다 보니 어떤 때는 좀 위험하기도 해서, 청설모에 대한 흥미를 줄여줄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진짜 청설모와 아주 비슷한 봉제 인형을 사기로 했다. 살아있는 청설모는 아니지만 비슷한 모습이라도 날마다 보면 호기심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얄팍한 기대를 하면서.


한국에서 잠깐 임시보호를 해 주신 분의 말씀대로 헌터는 장난감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굵은 밧줄을 엮은 것으로 당기기 놀이를 하거나 플라스틱 공, 신던 양말 같은 것을 던져주면 몇 번 물어오기도 했지만 그건 장난감 자체보다는 함께 겅중대며 노는 걸 좋아할 뿐인 것 같았다. 유일하게 공(treat ball)에 작은 간식을 넣어주면 꽤 오래 갖고 놀는데 그것도 단지 간식 먹는 재미 때문인 게 분명했다.


더구나 이가 워낙 튼튼해서 플라스틱 장난감에도 이빨 자국이 나는 걸 보고 처음엔 봉제인형은 사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아지도 아이들과 비슷하니 다양한 감촉을 경험하는 것이 두뇌활동이나 정서적으로 좋을 것 같아서 올리브그린 색의 예쁜 코끼리를 하나 사 주었다.

처음엔 턱에 받치기도 하고 무심한듯 다리 근처에 두기도 하면서 제법 잘 데리고 노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코끼리는 이전의 형태를 기억하기 힘든 꼴이 되었다. 이런 전적이 있는터라 봉제인형은 사주길 망설였다. 그런데도 청설모에 무뎌지기를 바라는 바램을 인형에게로 옮긴 것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헌터에겐 청설모와 관련된 흑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오래된 주택가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는데 헌터가 갑자기 어느 집 뒷마당을 바라보며 멈췄다. 처음엔 무얼 보는지 몰랐는데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잔뜩 긴장한 뒤태를 유지하며 움직이지 않길래 왜 그러나 싶어서 마당 안을 유심히 살폈다.

참나... 테이블 위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청설모 인형이 놓여있는 게 아닌가. 헌터는 그 인형이 진짜 청설모인 줄 알았던 것이다. 이 정도로 어리어리한 구석이 있다면 한 번쯤 해 볼만한 도전 아닐까?


청설모 인형을 사면서 처음으로 사주었던 코끼리 인형도 다시 샀다. '어쩌면 그럴지도..'라는 소망을 해피 앤딩이란 기대로 포장해서 집으로 왔는데 자기 앞에서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푸는 소리를 듣고 마치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꼬리를 보면서 해피앤딩은 무슨.. 호러무비 쪽으로만 안 가도 좋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어쩌면 그럴지도..'는 급하게 목표를 바꿨다. 그저 오래오래 잘 가지고 놀기만 해도 좋겠다.


하지만 그럴 리가...


순식간에 상황은 끝났다. 청설모는 헌터의 송곳니에 닿자마자 장렬히 전사했다. 너무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할 틈도 없었다. 헌터는 마치 날마다 자신을 놀리며 도망가는 청설모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조곤조곤 실밥을 뜯어내더니 부욱 찢기도 하면서 안에 든 솜들을 끄집어냈다. 그것도 조금씩 꺼내서 그야말로 퉤! 하는 폼으로 뱉는 동작을 계속 되풀이했다. 청설모에 대한 응징이 끝나자 죄 없는 코끼리도 기절했다. 한숨이 나오는 참혹한 현장이었다. 헌터, 너 정말 이럴 거야?



여섯 살 땐가, 아이의 학교에서  show and tell이란 시간에 발표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오라고 하자, 늘 끼고 살던 '심바'(네, 라이언 킹의 그 베이비 심바 맞습니다.)를 가져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가 맨 백팩의 지퍼가 조금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무심하게 닫아주는데 아이가 화들짝 놀란다. 엄마, 그렇게 하면 심바가 숨을 못 쉬어!

이렇게, 고단한 일상에 햇살 같은 피로회복제를 뿌려주던 아이였는데 거칠게 뜯어진 인형을 꿰매고 앉아있을 걸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났다.



아참, 어떡하니.. 너 돌연변이 똥손인데... 이참에 아직 깨어나지 않은 네 유전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보는 건 어때? 네가 족보에도 없는 똥손일리가 없어!

전화해서 놀려주려다 그만두었다. 안 그래도 끙끙거리고 있을 텐데 열받아서 바늘에 손가락이라도 찔리면 어쩌나 싶었다. 어쨌든 우리 집에는, 태어날 땐 너무 귀엽고 멋진 코끼리와 청설모였지만 꿰매고 꿰매고 또 꿰매서 코끼리는 도넛이 되고, 청설모는 올챙이가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헌터는 여전히 청설모를 쫓는다.


내가 밴쿠버로 돌아왔을 땐, 코끼리 인형은 좀 비싸서 두 개로 끝냈고, 청설모는 워낙 좋아해서 회색으로 다시 샀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여러 번 수선을 했다며 보여주는데, 잘 꿰맸다고 칭찬하는 내 빈말에 표정이 눈치껏 협조를 잘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주 간절히, 헌터가 다시 실밥을 낱낱이 뜯어주길 기다렸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쉽지 않은 수술이었다. 나는 어쩐지 미꾸라지를 닮아 정체성이 애매해진 청설모를 헌터에게 주면서 뻔뻔하게도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라는 어투로 ‘이제 됐다!’라고 말했다. 꽤 오래 잘 가지고 놀았다. 물론 이후로도 가벼운 수선은 일상이었지만.


이 청설모라고 우기는 미꾸라지 인형을 끝으로 다시 인형을 사주진 않았다. 아깝기도 하고 어차피 바로 물어뜯는데 무슨 모양이든 상관없지 않겠냐며, 새 인형을 사는 대신 낡은 플리스 담요를 잘라서 기다란 나무토막 모양으로 만들어 주었다. 손바느질이 역시 튼튼하다고 자화자찬하다 생각해 보니 헌터가 적극적으로 갖고 놀지 않아 오래간 것 같았다. 모양이 너무 단순하니까 재미가 없었나 보다. 오밀조밀 있을 거 다 있는 인형이 좋았던 거다. 그래, 너도 취향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래서 있는 손재주 놀리면 뭐 하냐며 인형을 만들어 주려다가, 이건 또 노력대비 너무 허무할 것 같아서 관두었다. 다행히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해서 아직까지 잘 갖고 논다. 바로 페이퍼 타월이나 휴지의 심지와 종이로 만든 달걀케이스다. 가끔 과자박스를 주기도 한다. 북북 찢고 잘근잘근 씹어 뱉는다. 음식의 맛보다 식감에 더 예민한 날 닮았는지 덴탈본이나 사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씹는 맛을 이렇게 보충하는 것 같다. 집안에서 사는 헌터 같은 종류의 개는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한다. 아마 사냥 본능도 남아있고 어지간히 긴 산책이 아니면 에너지를 다 소모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버릇을 고쳐야 하는지 고민한 적도 있는데 집에 있는 물건은 건들지 않길래 해도되는 경계만 지키면 그냥 두기로 했다.



내 눈치를 보는지 몇 달 동안 장난감을 사주지 않더니 친구와 쇼핑하러 갔다 오는 길에 헌터 인형을 다섯 개나 사 왔다. 'winners'에 갔더니 할로윈이 다가와서 재밌는 모양도 많고 펫샵보다 싸고 예뻐서 안 살 수가 없었다면서. 내가 봐도 모양이나 색감이 너무 예뻐서 정말 그냥 물거나 빨면서 갖고 놀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헌터야~ 19층에 사는 네 친구 '루시'는 그런다는데.... 응? 이웃집 애랑 비교하는 게 젤 나쁜 거라고?


하윤이 사 온 장난감 중에서 호박 그림이 있는 주황색 뼈모양을 골라서 집중 공략한다. 자신만의 취향이 있는 게 분명하다. '개취'는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개의 취향'이란 뜻인가? 잠시 개점휴업이었던 수선집이 다시 바빠질 예정이다. 그런데 손님~ 계산은 뭘로 하시겠어요? 헌터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빙구처럼 웃는다. 네~ 계산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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