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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Nov 07. 2022

너의 눈빛이 위로가 돼.

말수 적은 가을 곁에서


어둑한 새벽에 나서는 산책길은 날마다 조금씩 바뀐다. 사실은 내 의도가 아니라 헌터에게 매일 조금씩이라도 다른 길을 걷게 해 주려는 아이의 배려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가끔, 우리 여기 처음이지?라고 묻는다. 매번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무래도 방향치는 지병처럼 고쳐지지 않으려나 보다. 그나마 요즘은 집들의 생김새로 길을 구분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큰 나무들이 많은 집 뒤편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여전히 낯설 때가 있다.


Robinson Memorial Park Cemetery


그래도 헷갈리지 않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바로 공원묘지(Robinson Memorial Park Cemetery)로 가는 길이다. 헌터도 좋아하는 곳이라서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들르게 되는 이곳에 도착할 무렵이면 어느새 날이 밝는다. 이른 아침의 묘지는 한없이 고요하다.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깨질 것 같은 그 고요가 조심스러워 묘지의 맨 가장자리 입구로 들어가서 걷다가 뒤쪽 숲길로 돌아 나온다.


지금 이곳엔, 말수 적은 가을이 충만하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묘지에 가면 마음이 편안하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거기 낮게 엎드리거나 누워서 햇살과 바람을 즐기고, 때 되면 달라지는 계절이 그들의 이마와 가슴으로 고스란히 내려앉아서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아 괜히 안심이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의미 없는 것들로 다투거나 오해하지도 않고, 욕심도 없이 고요할 거란 상상으로, 아직 살아있는 자의 아프고 어수선한 시간들을 위로받는다.


나는 죽으면 화장을 해서 바다에 뿌려지길 바라니 저렇게 땅 한 뼘 차지하고 누울 일은 없겠지만, 한적한 주택가 한편에서 삶과 죽음이 마주한 풍경을 보는 것도 때론 아름답다. 어쩌면 묘지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에만 묻고 살기엔 너무 무거워서 조금 덜어 같이 딛는 땅 위에 부려놓기 위해, 혹은 살아가는 동안 이 말을 잊지 말라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어쩌면 이 지난한 삶도 죽음이란 약속이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 건 아닐까? 즐거움조차도 때론 그럴진대 굴곡진 이 삶에 끝이 없다면 얼마나 고단한 시간일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저런 생각을 흘리며 묘지 근처를 걷는다. 조금씩 시들어가도 여전히 다정한 꽃다발에서 사람들의 슬픔이 추억이 되어가는 걸 바라보거나 생의 언저리에서 굴절된 햇살이 다른 온기로 살아나는 걸 느낄 때면, 마음은 한없이 가난하고 유순해진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지켜보며 살아온 오랜 친구, 혹은 동의어 같다. 근처 벤치에 앉아 그들의 침묵에 조금만 더 기대고 싶지만 할 일 많은 아침 시간이라 아쉬운 마음을 접고 돌아 나온다.


드디어 지난주에 헌터는 내가 자기편인 걸 믿어주겠다는 증표를 나에게 주었다. 처음엔 집안에서 함께 있을 때도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더니 어느 날부턴가 가끔 내 방을 기웃거렸지만 들어오진 않았다. 나도 처음엔 덩치에 눌려 무서웠는데 함께 지내면서 보니 내가 본 개중에 가장 순하고 조심성 많은 개였다. 그래서 조금씩 가까이가며 쓰다듬기를 시도했는데 며칠 만에 헌터는 발랑 누워 앞발을 구부리며 애교를 떨었다. 이젠 됐구나 싶어서 좋아했는데 정작 감동은 따로 있었다.


개공원으로 함께 산책을 간 날이었다. 나는 혼자서 트랙을 걷고 있었고, 헌터는 조금 떨어진 잔디밭에서 이곳에 오면 늘 만나는 다른 개들과 놀고 아이는 다른 견주들과 함께 소소한 얘기들을 나누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 아이에게도 내색하지 못한 감정들로 멍한 상태였다. 슬픔이어야 하는데 슬프지 않고 그러기도 싫은 설명할 수 없는 오래 묵은 감정이 나를 조금씩 누르고 있었다.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혼자인 게 외로웠다. 몸은 한없이 가라앉고 있는데 마음이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허둥거렸다.


그때 다른 잔디밭으로 옮기기로 했는지 모두 움직이는 게 얼핏 보였다. 따라가야 하나 잠깐 망설이다가 아이에게 그냥 있겠가는 눈짓을 했는데 뒤숭숭한 마음 탓인지 터무니없는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때 등뒤에서 기척이 느껴져서 돌아봤더니 헌터였다. 조금 망설이듯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같이 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걷다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꿔서 나를 향해 가는 걸 보고 아이도 놀라서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는 순간 울컥했고,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속 깊은 존재를 보았다. 설마 네가 내 설움을 알았을까?


실감 나지도, 표현할 수도 없는 슬픔이 쌓인 시기였다. 밴쿠버로 돌아온 지 2주 만에 엄마가 돌아가셨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가지 않았다. 수십 년을 만나지 못하고 살았어도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아서 슬펐던 것처럼,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게 가장 슬펐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며 위로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마 그래서 헌터의 행동에 울컥한 것 같다. 어쩌면 헌터는 본능적으로 나도 알아채지 못한 내 슬픔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어쩐지 그랬을 것 같다. 예전에 유키도 그랬다. 내가 수술 후 회복기동안 우울증이 심했던 시기가 있는데 식구들이 걱정할까 봐 몰래 옷장 안에 들어가 주저앉아 울고 있으면 아래층에 있던 유키가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 곁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엄마가 이젠, 살아있을 땐 버리지 못했던 욕심이나 원망을 모두 버리고 편안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게 나의 가장 큰 슬픔이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가을은 웅숭깊어가고, 헌터의 눈빛이 그 어떤 가을빛 보다도 외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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