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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02. 2023

개는 마중물이다.

너의 눈코입, 그리고 털



헌터에 관한 키워드를 생각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있다. 바로 '털'이다.


조금 억센 등 쪽의 털은 베이지에 가까운 연한 갈색이고 목부터 가슴을 지나 배까지는 흰색의 보드라운 털로 덮혀있다. 엉덩이도 흰색인데 이쪽에 있는 털이 가장 길고 복슬복슬하다. 예고도 없이 아무 바닥에나 곧은 자세로 앉아있는 걸 좋아해선지 유난히 털이 잘 유지되는 부위다. 그리고 평소엔 거의 보이지 않지만 털갈이를 할 때 언뜻언뜻 보이는 속털은 놀랍게도 검은색이다. 그래서 비를 맞으면 주둥이 위쪽에 주근깨같은 자국이 생겨서 한도 초과의 귀여움을 발산하기도 한다.




밴쿠버로 온 후 첫여름에는 이마에 문신을 한 것처럼 검은 털이 보여서 털갈이를 할 때는 늘 그런 줄 알았더니 올여름엔 뽀송한 겉털이 그대로 있었다. 영양상태가 나아지고 털이 좋아지니까 털갈이를 해도 이젠 속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 왔을 땐, 마치 예전 시골 아이들 머리에 있는 기계충 자국처럼 털이 없는 부분이 세 군데나 있었다. 부분탈모이거나 다쳐서 상처를 치료한 자리일 거라 짐작하면서 영영 털이 안 나올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나자 어느새 털이 자라서 자국이 깜쪽같이 사라졌다. 그 자국을 없애기 위해서 헌터가 뭔가를 했을 리도 없는데 괜히 기특하고 기뻤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아, 헌터의 '털'에 대해 쓰는 중이지. 그런데 쓰고 싶었던 게 분명 이런 내용은 아닌데...


누가 나에게 결벽증이 있다고 하면, 속으론 인정하면서도 그건 아니고 정리벽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나는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단점이 되는 억울함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다. 남에게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하는데, 깨끗한 게 죄는 아니잖아? 누군가 불편하게 생각한대도 할 수 없다. 나는 나와 반대인 사람들이 불편하니까 공평한 거지.


먼지 알러지가 심하고 호흡기가 약한 편이라 청소와 환기가 중요하고, 모든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똑바로 놓여있어야 심신이 안정되고, 무슨 일이든 맘먹고 시작하려고 할 때는 청소와 정리정돈부터 하는 습관이 있다. 식구 중 누가 특정 물건을 찾으면, 그건 어느 서랍장 몇 번째 서랍 어느 쪽에 있다고 바로 말해 줄 수 있어야 내가 살림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식구들에게 그렇게 하길 강요한 적은 없다. 내게 맞춰주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이겠지만 불행하게도 아이들과 남편은 그쪽으로는 다른 별에 사는 생명체들이다. 그리고 이건 가르치거나 모범을 보인다고 되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았다. 타고나는 성향 같았다. 치우고 안치우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질러진 상태를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게 다른 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식구들 모두 정리는 안 해도 제 몸 하나 씻고 닦는 건 잘했고, 그리 더럽지 않은 옷도 홀딱홀딱 잘 벗어서 세탁기 주변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대견하게도 주말의 청소기 돌리기와 화장실 청소는 남편이 했다.(하지만 이 혜택에서 벗어난지도 벌써 11년이 되었다.) 이게 어디냐 싶어서 오냐오냐 했더니 주방에서 할 줄 아는 일은 주말 아침에 팬케익을 굽고 가끔 커피를 내리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여름에 뒷마당에서 바베큐를 할때면 고기는 잘 구웠다. 가끔 설거지를 하겠다고 할 때도 있었지만 내가 결사 반대했다. 그릇 하나를 가지고 얼마나 오래, 뽀독뽀독 소리가 날 때까지 씻는지 그릇에 있는 물레 자국까지 지울 기세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창문을 닦거나 마당의 낙엽을 치우고 빨래를 함께 개켰다. 뭐든 내가 시키는 일에 반항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마음만 받겠다며 집안일을 많이 시키진 않았다. 어른되면 어차피 해야 할 일들, 대신 해 줄 어른이 있을 때 놀아라.


하지만 같은 성을 가진 이 세분들은 집에 들어오면 오분 안에 집안의 자잘 한 물건들의 위치를 바꾸고 뭔가 새로운 것들을 자꾸 늘어놓았다. 마치 설치 미술을 하는 것 같았다. 양말이 겨우 두 짝인 게 고마웠다.(나머지 한 짝만 찾으면 되니까.) 목마른 놈이 샘 판다고, 날마다 정리하고 청소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건 절대 이타적인 행동이 아니다. 순전히 나의 정서적 안정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식구들 중 아무도 내게 그러라고 강요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좀 원초적으로 말하자면 업보라고나 할까.. 아마 나는 전생에 굉장히 게으름뱅이였거나 아주 지체가 높아서 이런 자잘할 집안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달리니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무뎌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집을 떠나 먼 곳에서 사는 식구들이 생겨 양이 좀 줄었을 뿐, 날마다 하는 루틴은 똑같았다. 게다가 마지막 남은 한 명이 꽤 바쁜 데다 충실한 부계 혈통의 계승자라서 정리와 청소의 일상은 지속되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정설에 반론을 제기하며 산 적도 있다. 어느 날 출근 준비를 하면서 평소 같으면 바로 치웠을 물건을 발로 슬쩍 밀고 지나가는 나를 발견했다. 어쩌면 그냥 한때의 유행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번아웃과 늘 숨어만 있던 우울증의 협공을 받았을 때였다. 하지만 이 증세는 직장을 그만두고 일 년쯤 지났을 때 없어졌다. 그래도 나이는 못 속인다고 이젠 예전처럼 깔끔을 떨진 못하고 내 까탈스런 성향과 그럭저럭 타협하며 사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강적을 나타났다.


덩치 크고 털 많은, 무슨 짓을 하든 '난 아무것도 몰라요~'란 표정을 장착한, 헌터라는 녀석과 식구가 된 것이다. 하루가 털로 시작해서 털로 끝난다.


오래전에 집을 보려고 리얼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젊은 여자였는데 임신 중이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 그녀를 만났는데 꽤 피곤해 보였다. 앞서 걷는 그녀를 뒤따라 가다가 정말 깜짝 놀랐다. 그녀의 코트 뒤에는 개털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묻어있었다. 어떻게 저런 옷을 입고, 게다가 오픈 하우스에 올 수가 있지? 대체로 리얼터들은 완전 정장으로 깔끔하게 빼입는 편이라서 그녀의 차림새를,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옷에 묻은 개털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직업의식이 남다른 사람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를 이해한다. 만약 그녀가 하윤처럼 강아지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기회만 되면 어떻게든 함께 치대며 놀고 싶은 사람인데다 개털 묻는 것쯤은 그리 개의치 않는다면, 임신한 몸으로 휴일 아침 일찍의 외출에는 그럴 수도 있는 거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만큼 관대하거나 무난한 사람이 아니라서 하루종일 털과의 전쟁을 치른다. 아이가 외출을 할 때면 그 리얼터를 떠올리며 아이를 현관에 세워놓고 공항의 보안검샥대에서 하듯 아이 옷의 구석구석에 돌돌이 테이프를 들이댄다.


날마다 두세 번씩 청소기를 돌리고, 헌터가 머물다 간 자리마다 돌돌이를 굴리고, 물고 던지며 놀던 장난감과 찢어놓은 종이 박스를 치운다. 숨만 쉬어도 털이 빠지는 녀석이니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처음으로 내 결벽증과 정리벽을 한탄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이쯤 되면 헌터가 귀찮고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털을 빗길때나 청소기를 돌린 후에 소복하게 모아진 털을 치울 땐 귀엽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제대로 세뇌당한 것 같다. 털 빠지는 것만 빼면 완전 무해한 녀석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개털과 결벽증이 싸우면 털이 이긴다.


혹시 내가, 나처럼 청소와 정리정돈을 밥 먹는 횟수보다 자주하는 사람은 헌터처럼 털이 많이 빠지는 개는 입양하지 말라고 충고할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무엇이든 한 가지 단점으로 전체를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어떤 존재는 성가신 단점조차도 웃음이 되게 한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개는 그런 존재다.


마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저 깊은 땅속에 있는 물을 끌어올려 콸콸 쏟아지게 하듯이 아주 작은 한 가지로도 인간의 마음속에 방치된, 조건 없이 선하고 다정한 이타적인 마음을 끌어올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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