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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Oct 05. 2023

문득 생각났던 그 대사

아프냐 나도 아프다 _ 다모



헌터가 밴쿠버에 온 지 6개월이 넘었고, 해가 바뀌었다.


길게는 일 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보통 3,4개월이면 입양이 된다고 했는데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아이가 따로 헌터 계정을 만들기도 했지만 어쩐지 입양기관에서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분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우리가 보기엔 그랬다. 착오로 첫 3개월 동안 거의 홍보가 없었던 것도 그렇고, 예쁘게 나온 최근 사진을 보내도 잘 활용하지도 않는다며 하윤은 속상해 했다.

 

하윤에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입양될 때까지 잘 보살펴 준다고만 생각하자고 했는데 아이는 나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임시보호 기간이 길어지면 새로운 곳에 다시 적응하는 게 더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우리 집을 영원한 자기 집인 줄 알다가 다른 곳으로 입양되면 우리가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냐며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헌터가 일 년 동안도 입양이 안되면 그땐 우리가 입양하자.


사실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그전에 입양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산책할 때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얼마나 귀여움을 받는 녀석인데... 마치 잘난 내 새끼가 왜 안돼?라는 심정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임시보호는 변수가 많고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꽤 어려운 일이란 걸 새삼 알았다. 처음으로 맡은 임시보호 강아지가 적당한 시기에 좋은 곳으로 입양이 되어야 탄력을 받아서 지속할 수 있을 텐데 뭔가 답답하기도 하고 헌터가 안쓰럽기도 했다. 하윤은 올해는 직장을 바꿔서 다른 나라에서 몇 년 정도 일할 계획도 세우고 있던 터라 여러 가지로 애매한 상황이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1년을 마지노선으로 정했다.


새해 첫날,

집에서 조금 먼 숲으로 산책을 갔다. 지난밤에 친구 집에서 파티가 있었던 하윤은 오늘 아침을 위해서 먼저 일찍 빠져나와 집으로 왔었다. 예상대로 평소에 숲길을 걷거나 조깅을 하던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모두들 늦잠을 자거나 느긋한 새해 아침을 맞고 있을 것이다. 평소엔 사람들한테 방해가 될까 봐 풀어주진 못하고 줄이 긴 목줄을 했는데 오늘은 헌터 세상이다. 목줄을 풀어주었더니 신이 나서 앞서 걷기도 하고 크릭이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다른 방향에서 덤불을 헤치며 갑자기 뛰어나와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두 시간쯤 숲길을 걸었다. 헌터가 혼자 걸으면 하윤도 훨씬 편하고 느긋하게 걸을 수 있다. 한 해의 첫 시작으로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한 시간이었다.


숲에서 충분히 놀아서 그런지 일주일 내내 헌터는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주말에 목욕을 시켰는데 워낙 목욕을 싫어하는 녀석이라 보상으로 목욕 후에 큰 뼈를 주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비키가 선물한 뼈들 중 하나였다. 헌터는 좋아라 물고 제 침대로 돌아가 갉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가 튼튼해도 그냥 겉만 좀 갉다가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도 오래 갉는 소리가 나서 봤더니 한쪽 끝이 많이 없어졌는데 근처에 부스러기가 없었다. 아무래도 헌터가 먹은 것 같아서 조금 걱정스러워서 뼈를 치웠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그래도 되니까 팔겠지? 혹시 얘가 이가 너무 세서 다른 개들은 못하는 걸 한거 아냐? 우린 서로에게 이런 비슷한 물음을 계속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잊으려고 애썼다. 갑자기 뼈를 빼앗겨 불만인 헌터는 평소에 먹는 덴탈본으로 달랬다. 저녁도 잘 먹는 걸 보니 별 탈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몇 시간 후부터 행동이 약간 이상해 보이더니 식탁 밑으로 들어가서 토를 했다. 그것도 정말 왈칵 쏟아졌다는 표현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토사물이었다. 헌터는 철저한 실외 배변 개라서 집안에 분비물로 실수한 적이 없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처음 왔을 때부터 속이 불편한 기색을 자주 보이며 헛구역질을 하거나 풀을 뜯어 먹기도 해서 위가 안 좋다는 걸 짐작은 했었지만 먹이와 간식을 몇 번 바꾸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증세는 없어졌는데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헌터는 계속 토하고 설사를 했다. 토하는 건 참을 수가 없는지 집안에서 하는데 똥은 꼭 밖에서 싸려고 해서 밤을 꼬박 새우며 들락거렸다. 나가면 또 걸으려고 해서 아무도 없는 새벽길을 무서운 줄도 모르고 걷다 보면 헌터는 또 싸고 토하고를 반복했다. 하지만 개들은 몸이 안 좋으면 이삼일 정도 굶으면서 자가 치료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인터넷을 찾아봐도 그 정도는 두고 보는 게 좋다고 해서 병원 가는 걸 미뤘다. 그런데 먹은 것도 없는데 나오는 설사의 색깔이 너무 붉었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동물 병원에 갔더니 탈수 증세가 보인다며 아이비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뭔가를 먹일 텐데 나중에 똥으로 작은 알갱이 같은 것이 안 나오면 어딘가 막힌 거니까 그러며 좋지 않은 징조라고 했다. 대여섯 시간쯤 걸린다고 해서 헌터를 병원에 두고 왔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저녁에 데리러 갔더니 아이비 덕인지 마치 이젠 다 나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헌터는 다시 설사를 하고 토했는데 마룻바닥에 뭔가 부딪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펴봤더니 토사물 속에 제법 큰 시멘트 조각처럼 생긴 게 있었다. 뼈조각인 것 같았다. 괜히 내 속이 시원해 진 것 같으면서 이젠 됐다 싶었지만 조금 줄었을 뿐 토하는 건 여전했다. 다행히 똥에서 수의사가 말한 작은 알갱이들은 보였다. 하지만 병원에서 준 통조림 같은 밥도 안 먹고 만들어주는 미음이나 죽도 조금밖에 안 먹으면서도 계속 토하고 붉은 변을 봐서 다시 병원에 갔다. 이번엔 엑스레이 조영술로 뱃속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만약 위나 장에 아직 남아있는 게 있으면 제거하기 위해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꽤 큰 수술이라고 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러다 헌터가 잘못되면 어쩌냐고 아이는 벌써부터 엉엉 울었다.


다행히 엑스레이 사진으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수액을 맞더니 기운을 차렸는지 기분도 좋아 보였다. 치료실에서 나오다가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반가운 걸음으로 다가오자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서 괜히 울컥했다.  다들 아픈 동물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라서 남의 개의 이런 모습만 봐도 덩달아 안도하는 것 같았다.


주말엔 병원 문을 닫는다며 주사약과 목뒤에 한꺼번에 넣는 아이비를 챙겨주면서 주사 놓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이를 둘이나 키웠지만 예방접종 때마다 아이만 끌어안고 고개는 돌렸었다.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걸 볼 수가 없어서였다. 친했던 소아과 선생님은, 무슨 엄마가 이러냐고 놀리셨는데 이런 내가 무슨 수로 주사를 놓는단 말인가. 그런데 이때 깨달았다. 아이가 이젠 어른이라는 사실을 내가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온 후 만일에 대비해서 응급병원을 확인하고, 제발 주말 동안 나아지기를 바랐다. 이젠 토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는데 먹는 게 문제였다. 토할 때는 굶는 게 좋겠지만 너무 길어지니까 뭐든 먹여야 했다. 병원에서 준 통조림처럼 된 개밥은 여전히 아예 입도 안 대고 집에서 끓인 미음이나 닭죽도 조금 받아먹다 말았다. 소화를 시킬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어서 닭 가슴살을 삶아서 조금씩 떼어주었더니 제법 받아먹었다. 헌터가 조금이라도 먹으면 좋으면서도 조마조마했다. 헛구역질을 하거나 목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불안해서 목을 세우고 가슴을 쓰다듬어 주면서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우리는 사뭇 비장하게 준비를 했다. 헌터가 엎드려 있는 바닥에 둘러앉아서 한참을 쓰다듬어 주다가 혹시라도 놀라서 심하게 움직일까 봐 내가 살짝 잡고 하윤이가 목덜미에 주사를 놓았다. 아이가 늘 아쉬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헌터는 신체적 접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안아도 가만히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고 좋아했지만 주사를 놓는 동안 움직일까 봐 걱정했는데 아파서 힘이 없어선지 아니면 저도 상황을 아는 것인지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다행히 바늘이 가늘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이 못난 엄마는 장한 두 아이들을 위해 현수막이라도 만들어 걸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비 주사는 포기했다. 바늘이 어찌나 크고 두꺼운지 도저히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물과 닭고기 삶은 것을 조금씩 먹기 시작해서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월요일에도 여전히 물똥이면서 색깔이 붉어서 병원에 전화를 해서 현재 상태를 모두 설명했더니 그 정도면 나아지는 것 같으니까 토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했다.


이틀쯤 후인가, 헌터가 정상적인 똥을 쌌다. 우린 거의 동시에 거리가 떠나가라 환호했다. 이제 됐다. 아가들도 열나고 아프다가도 예쁜 똥 싸면 다 나은 거거든. 정말 다행하게도 다시 병원에 가진 않았다. 캐나다는 사람들의 의료보험은 무료인데 동물들은 보험이 안되어서 개인적으로 보험을 들기 전에는 병원비가 무척 비싸고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정말 큰돈이 든다. 헌터는 임시보호 중이라 보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치료비도 꽤 부담이었다. 하윤인 자기가 돌보는 동안 생긴 일이니 반이라도 내겠다고 했지만 한국의 입양기관에서 모두 보내주었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서 추가로 청구된 비용은 알리지 않고 우리가 냈다.


그 후로도 헌터는 2주 정도 완전히 정상을 돌아오진 못했다. 늘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이었다. 헌터가 조금만 이상한 소리를 내도 각자의 방에 있다가도 동시에 뛰어나오고 음식을 먹고 똥을 싸는 가장 원초적인 행동에 초긴장을 했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과 유산균을 계속 먹였는데 아이가 알아보니까 유산균이 안 맞으면 헛구역질을 하거나 토할 수 있다면서 먹이지 말자고 했다. 나도 담낭 제거 수술 후에 소화에 문제가 많아서 몇 년 동안 유산균을 먹었는데 내게 맞는 유산균을 찾을 때까지 꽤 고생했던 기억이 나서 그러기로 했다. 헌터의 자연 치유력을 믿어보자.


헌터는 겨울이 시작되면서 몸집이 좀 커져서 나는 살찐 거 같다고 하고 아이는 털이 찐 거라며 둘이 즐겁게 투닥거렸는데 아프면서 다 빠져서 홀쭉해졌다. 체형이 가슴이 처진 편이라 얼핏 보면 과체중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살이 빠져서 처음 밴쿠버에 왔을 때 같았다. 그러다 다시 조금씩 살이 오르는 듯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근육도 도드라지고 의젓해 보였다. 아이들은 아프면서 큰다더니 개들도 그런가 싶었다. 그 후로도 눈에 띌 정도로 크는 게 보여서 혹시 추정 나이가 잘못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보통 개들은 한 살에서 한 살 반이면 다 크는데 헌터는 만 세 살인데 아직도 크고 있는 것 같다. 강아지 때 영양부족으로 발육이 좋지 않다가 환경이 좋아져서 뒤늦게 크는 걸수도 있단 생각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픈 중에 생일(구조되어 첫 예방접종 한 날)이라 맛있는 별식도 못해줬다.


내가 아프면 당연한 일이지만 함께 사는 누군가가 아파도 건강했던 평범한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더구나 말 못 하는 동물이 아프면 사람이 아픈 것과는 또 다른 측은함과 안타까움이 생긴다. 그래도 수술은 안 하고 이만큼 나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잘 견뎌준 헌터가 고마웠다.


이제 헌터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할 즈음에 입양 신청이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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