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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Sep 19. 2023

모든 결심은 '갑자기'가 아니다

그 순간 떠올랐던 이름, 헌터.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누군가의 변화는 ‘갑자기’ 결정한 것처럼 보이기가 쉽다. 하지만 ‘갑자기’ 이뤄지는 결심이나 결정은 거의 없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누군가 갑자기 돌변해서 ‘우리’라는 관계에서 빠져나간 것 같아도 관계를 깬 당사자는 오랫동안 망설이며 혹시 단절하고 싶은 마음이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수 없이 되짚어봤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낯설지 않은 한 방울의 물이 또 떨어졌고, 표면적으론 사소한 ‘한 방울’에 불과한 그 물이 촉매가 되어 컵 안에 아슬아슬하게 담고 있던 물이 넘치는 것이다. 그렇게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속한 세상은 집과 일이 전부였다. 사람도 책도 글쓰기도 그림도 음악도 다 귀찮고 시끄러웠다. 책 속의 글자들도 시끄러울 수 있다는 걸 이때 경험했다. 성실하게 의무를 다하면 당연하게 차지할 수 있는 권리처럼 진행되던 삶이 어느 순간 지각변동을 일으켜서 나를 다시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패대기를 쳤다. 내 선택이었지만 단 하나뿐인 선택지를 선택할 때의 무력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절망이다.


다시, 날마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떠올리는 생활이 되었다. 싫어하는 일을 날마다 반복하기 위해선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집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중해서 보지도 않는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영상을 멀찍하게 틀어놓고 소파에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서 가수면 상태를 들락거렸다. 그야말로 손도 까딱하기 싫고 머릿속엔 쌀뜨물이 꽉 찬 것 같은데도 마치 ‘진자’의 움직임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죽을 것처럼 피곤했는데도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렇게 6년이 지나갔다. 내 주변을 떠도는 무기력이니 번 아웃이니 하는 단어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무렵, 일 년치 휴가를 모두 한꺼번에 쓰고,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는 패잔병이 백기를 들 듯 이메일로 사표를 냈다.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갑자기’ 왜?


단 둘이 같이 살면 바이오리듬도 닮아가는 걸까? 내가 ‘더는 버틸 수가 없다.’는 증세를 더는 숨길수도 없을 무렵, 아이도 건강이 나빠졌다.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좀 이르다 싶게 팀장이 되어서 일에 치여 살 때는 아무리 바빠도 불평하진 않았는데 회사가 점점 축소되고 납득하기 어렵거나 부당한 일들이 생기자 일은 훨씬 쉬워졌는데도 못 견뎌했다. 성취감이나 자긍심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오른 연봉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몸을 망가뜨리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몇 달씩 생리를 안 하고 호르몬 수치가 균형을 잃고 갑상선에 이상이 와서 체중이 비정상적으로 늘었다. 그러면서도 운동을 하는 건 고사하고 누가 ‘운동을 하라’고 말하는 것조차 화를 냈다. 그러던 중에 15년 동안 함께 살았던 강아지 ‘유키’가 세상을 떠났고 슬픔은 깊고 오래갔다, 아이는 모든 것이 더 이상 나빠지지 못할 만큼 바닥이라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살다 보면 이런 시기가 몇 번쯤 오는 게 인생이고 이 또한 결국엔 지나간다는 것을, 막상 닥쳤을 땐 수긍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우린 둘 다 알고 있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변화 후에 닥칠 일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최악이 아니라고 해서 최선이 되는 건 아니지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모든 잠재적인 불안을 불확실하다는 이유만으로 긍정의 편에 세워 놓고,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아이는 긴 휴가를 내서 혼자 영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날마다 보내는 문자와 사진 속의 아이는, 갤러리와 박물관을 돌아다니고 뮤지컬을 보고 느끼한 음식이 질릴 쯤, 호텔 근처에서 컵라면을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고 기뻐하고 런던에서 살고 있던 친구들과 함께 프라하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고, 혼자서 바람에 입술이 터지는 언덕을 여섯 시간째 걷고 있었다. 엄마, 나 생리 해. 5개월 만이었다.


나는,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없진 않았지만 나름 홀가분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은 그곳의 가족들이 채워 주리라 생각하며 미련 따윈 없는 사람처럼 정리를 했다. 오래전에 아이들 앞으로 들어 둔 생명보험 증서를 아이에게 주고, 전화를 없애고 차를 팔았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더구나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산 긴 세월이 얼마나 충격적인 다름과 오해를 만들 수 있는지를. 내가 변하지 않았어도 상대방이 변했다면 치명적인 불통의 관계가 되는 게 가족 간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의 회로가 전혀 다르다는 건 감정의 폭력이었다.




공항의 국제선 출국 게이트 앞에서 나를 껴안으며 아이가 말했다. .


엄마, 밴쿠버로 다시 돌아오고 싶으면 아무 때나 와. 그냥 나 보러 여행으로 오는 거 말고 아주 다시 오는 거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래도 6개월에 한 번씩은 올게. 나중에 받을 연금 깎아먹지 않으려면 그래야 하니까.


우리는 함께 웃었고, 아이의 걱정이 뭔지도 알고, 나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내 결정을 믿어주기로 했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아주 오래전, 가진 것 없이 어린아이들과 함께 시작했던 이민 생활보다는 쉬울 거라 생각했고, 어쩌면 이젠 성인이 된 아이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내가 짐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이는 그런대로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마냥 좋을 줄 알았던 혼자 사는 생활이 생각만큼은 좋지 않고 엄마가 많이 보고 싶다는, 아부성 발언을 할 때마다, 그럼 나 돌아갈까?라는 말을 하진 못했다. 너무 진심이어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내 결정이 잘못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막막했고, 견뎌낼 자신이 점점 없어졌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막막함은 극복보다는 포기가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한국에 머문 지 두어 달쯤 되었을 때였다.

날마다 주고받는 일상적인 이야기일 거라 생각하며 아이에게서 온 카톡 문자를 열었는데 ‘갑자기’ 한국의 보호소에 있는 강아지를 ‘임시보호’하기로 했다면서 엄마가 편한 시간에 통화를 하자고 했다. 바로 전화를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임시보호라니?


‘갑자기’는 아니고 오래 생각했던 거야. 전부터 가끔 보던 한국의 개 보호소 사이트가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한 군데가 곧 문을 닫아야 한대. 근데 아직 입양되지 못한 애들이 몇 마리 있는데 외모나 트라우마 때문에 한국에서는 입양이 잘 안 되는 애들이라 해외입양을 보내려고 한다네. 좀 전에 통화했는데 어떤 강아지를 임시보호 하고 싶냐고 물어보는데 몇 마리 얼굴이 떠오르긴 했지만 갑자기 누굴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그런데 문득 한 이름이 떠올랐어. '헌터'라고... 이상하지? 사진으로 보고 그렇게 끌리는 강아지도 아니었는데 왜 그 이름이 생각 났는지 몰라. 하긴 어떤 애든 상관없긴 해. 그냥 단 한 마리라도 내가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헌터? 사냥개야?


나의 단순한 발상에 아이는 웃었다.


진도 믹스니까 사냥개 비슷하겠지? 아, 그래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나? ‘헌터’는 대개 백인들이 잘 생긴 아들한테 주는 이름이란 이미지가 있어서 한국에서 오는 강아지의 이름치곤 좀 웃기다고 생각했거든.


진도믹스? 그럼 엄청 큰 개잖아.


엄청 크긴... 그 정도면 미디엄 사이즈지.


사진 있어?


아이가 카톡으로 바로 보내준 사진에는 지금 2주째 헌터를 임시보호 하고 있는 어떤 여자분과 함께 찍은, 내 눈에는 정말 집채만 한 누렁이 한 마리가 있었다. 엉덩이 쪽이 도드라지는 카메라 앵글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일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정말 컸다.


헌터랑 같이 찍은 여자분이 체구가 무지무지 작으신 거겠지? 그렇다고 말해줘, 제발.


아이는 큰소리로 웃었다.

나는 갑자기 엄마답게(?) 온갖 걱정을 다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큰 강아지면 똥도 엄청 큰 거 쌀 텐데... 너 치울 수 있어? 유키는 우리 손가락만 한 똥을 쌌잖아. 그리고 혼자서 목욕은 또 어떻게 시키니... 이렇게 큰 개는 콘도보다는 하우스가 좋을 텐데.. 힘도 셀 텐데 산책시킬 수 있겠어? 그리고 왜 굳이 이 먼 한국에 있는 강아지야...그리고 무엇보다 몇 달이라곤 하지도 함께 살던 강아지를 다른 곳에 보낼 수 있겠어? 그동안 정들 텐데.. 그리고 혹시 밴쿠버에서 입양이 안되면 어떡해. 그럼 네가 계속 키워야 하는거잖아. 기타 등등...아이는 자기의 결정에 토를 다는 게 싫었는지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엄마. 내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사지 말고 유기견을 입양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어. 마치 입양이 최고의 선택이고 브리더는 최악의 직업인 것처럼. 지금도 이 마음엔 별로 변함이 없지만...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한 번도 강아지를 입양한 적이 없더라고, 유키도 막 태어난 강아지를 사 왔잖아.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나는 하지도 않으면서 남한테만 권하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더라. 유키 보내고 난 후에 아직까지도 다른 강아지를 입양할 마음의 여유는 없는데 나름 큰 결심을 한거야. 구조된 개들은 대개가 트라우마가 있어서 임시보호가 정말 중요하거든. 처음 해보는 거라 좀 떨리긴 하지만 임시 보호하는 동안 잘 보살펴서 좋은 곳으로 입양 보내면 꽤 보람있을 것 같아. 앞으로도 내가 강아지를 키우게 되어도 임시보호는 계속할 생각이야. 그리고 엄마는 이젠 같이 살지도 않을텐데 뭘 그리 신경 써. 내가 알아서 할게.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헌터의 큰 몸집이 어른거려서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이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아무에게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밴쿠버로 다시 돌아가는 일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돌아가면 아이와 함께 살아야 할 텐데, 아무리 자식이라도 성인이 된 후에는 자신만의 삶이 있으니 부모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아이의 일상 속으로 끼어드는 건 정말 하고싶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무서운 큰 개도 있다. 다행인 건 임시보호라니 아직 결정하진 않았지만 내가 돌아가기 전에 다른 곳으로 입양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식용으로 사육되던 농장에서 구조될 당시의 헌터


캐나다로 출발하기 전날,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 산책을 하는 헌터. 보호소가 문을 닫게 되어서 임시보호를 해 주신 분과 2주정도 함께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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