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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Sep 24. 2023

웰컴 투 캐나다, 헌터

2022년 6월 21일 _ 이민 온 헌터



드디어 내일이면 헌터를 만나는데 벌써부터 떨린다는 아이의 문자를 받은 건, 바닷가 옆의 송림속을 걷고 있을 때였다. 아침이라 그런지 산책 나온 개들이 자주 보였다. 문득, 헌터도 이런 곳으로 입양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에도 이렇게 좋은 환경이 있는데 그 멀리까지 가야하다니... 한국에선 입양이 안되고, 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나 환경으로 보면 더할 수 없이 좋은 곳이 캐나다지만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건 경험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입이었다. 오래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알 수없는 곳으로 이민을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내게 이민이 희망보다는 도피였다면 헌터에겐 희망이고 행복일 것이다. 참 다행이다. 




(지금부터는 아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전지적 작가 시점.)


지난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불면증 같은 건 아예 없는 체질인데 아마 긴장때문인 것 같다. 자세한 정보나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다 보니, 기대되는 즐거움도 있지만 점점 무거워지는 책임감이 체증으로 느껴진다.

하윤은 혹시라도 비행기가 도착하기 전에 해야 할 서류절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구실 삼아 예정보다 일찍 집을 나서기로 한다. 에스프레소 캡슐로 커피를 내려 머그에 붓고 얼음을 가득 채워서 들고 나왔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두 시간이나 일찍 왔네.


늘 그렇듯이 국제선의 입국장은 뭔가 어수선하다. 설레는 마음과 반가움이 여기저기서 보이지만 , 누군가는 오랜 기다림으로 지치고 무료한 표정이기도 하다.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감정을 가진데서 오는 어수선함일 것이다. 게다가 낯선 사람들과 등을 대거나 마주 봐야 하는 구조의 의자 때문에 오래 앉아있기는 불편했다. 비행기 도착 예정 시간은 아직도 멀고, 미리 해야 할 서류 작성이나 절차도 없었다.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국장인 위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밴쿠버 공항의 국제선 출국장 앞에는 작은 야외 음악당처럼 꾸며놓은 공간이 있다. 완만한 곡선으로 이뤄진 계단식 벤치에 앉으면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등 뒤로 지나가고 곧바로 시선이 가 닿는 곳엔 높은 천장과 수천 개의 푸른 판유리로 바다 풍경을 표현한 The Great Wave라는 작품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그리고 무대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조각상이 있다.

 

The Spirit of Haida Gwakk : The jade canoe @Vancouver International Airport


‘하이다 과이의 영혼:옥빛 카누(The Spirit of Haida Gwakk: the jade canoe)’란 제목의  ‘빌 리드(Bill Reid)’의 작품이다. 원본은 퀘벡의 ‘역사박물관’에 석고 형태로 보관되어 있고, 이곳에 있는 건 두 번째 주물이다.


카누 위에는 사람과 동물이 촘촘하게 기대앉아서 함께 노를 저으며 어딘가로 향해 가는 듯한 모습이다. 동물들 중에서 특히 큰 까마귀(레이븐)와 독수리는 하이다 부족의 혈통을 나타내는 중요한 두 상징이다. 하지만 이 조각상이 의미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부족이나 문화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가 한 가족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볼때마다 성경 속의 ‘노아의 방주’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윤은 스타벅스가 가까이 있는 곳에 앉았다. 여기에 앉으면 조각상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대신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주춤거리는 관광객들을 피할 수 있어서 출국 시간을 기다릴 때면 늘 앉는 곳이기도 하다. 비로소 차분하게 앉아서 커피도 마시고 책을 읽다가 폰도 보면서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비행기 도착 시간이 다 된 것 같아서 확인도 할 겸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가는 동안 깊은 심호흡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강아지를 처음 키우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까 싶다가도 상황이 다르니 당연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어쩌면 입양이었으면 기다리는 동안 그저 설레기만 했을 것도 같다. 아무래도 이 긴장감은 ‘임시보호’라는 것에 대한 책임의 무게 같았다. 뭐랄까.. 임시보호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함께' 뒤엉켜서 살아가면 된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내 식구가 아니라 아픔이 많아 조심스러운 손님을 맞는 느낌이다.

혹시 내가 마음만 앞서서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한 건 아닌지, 나쁜 환경에 있다 구조된 개니까 트라우마가 있을 텐데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헌터만큼 큰 개는 키워본 적이 없으면서도 개를 사랑한다는 마음만 믿고 너무 자만한 건 아닌지... 자꾸 되짚고 있었다.


전광판에 헌터가 탄 '캐나다 에어라인'이 도착했다는 사인이 들어왔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서 세관통과절차를 밟았다. 헌터 외에도 한 마리가 더 있었는데 두 마리 모두 지금 ‘이미그레이션’을 통과 중이라고 했다. 아, 헌터도 이민을 오는거구나. 30분쯤 후에 포터가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케널을 얹은 트롤리를 끌고 나왔다. 작은 쪽이 헌터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한국에서부터 ‘이동 자원봉사’를 하신 분도 따라 나왔다. 이동봉사를 하신 분과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사진을 한국으로 보낸 후 바로 마중 나온 사람과 떠났고, 다른 강아지는 입양한 분들이 직접 나와 있다가 데리고 갔다, 순식간에 헌터와 둘만 남았다. 잠깐 막막했다. 큰 케널 안에 들어있는 헌터, 총무게가 30 킬로그램 이랬는데 이걸 어떻게 옮기지... 평일이라 친구들이 모두 근무 중이라서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호기롭게 혼자 나온 걸 잠깐 후회했지만 헌터가 얌전하게 있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우버를 부르고 트롤리에 헌터를 얹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왔다. 운전하시는 분이 도와주셔서 차 뒤쪽으로 헌터가 든 케널을 실었다. 혹시 불안해할까 봐 가는 중에도 창살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서 만져주었더니 가끔 쳐다보기만 할 뿐 가만히 있었다. 집 근처에 사는 친구 셜리가 재택근무 중에 잠깐 나와서 로비에서 기다리다가 함께 집까지 올라갔다.

 

집에 도착해서 케널의 문을 열었더니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온 헌터는 바로 하윤에게로 다가오더니 가슴에 이마를 갖다 댔다. 긴 비행동안 갇혀있다 나왔으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어쩐지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 같아서 뭉클했다. 우선 오줌과 똥을 누어야 할 텐데 조용한 곳이 좋을 것 같아서 이층에 있는 작은 '중간정원'으로 나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차소리도 안 나니까 안심이 되는지 갑자기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하윤은 거의 뛰다시피 하며 따라갔다. 잔디밭 위로 껑충 올라가더니 똥을 싸고, 아주 오래오래, 눈까지 지그시 감으며 오줌도 쌌다.


그런데 내려올 땐 괜찮더니 엘리베이터를 다시 안 타려고 했다. 처음엔 뭘 모르고 따라 탔는데 엘리베이터가 좀 빠른 편이라 더 무서웠나 보다. 헌터야~ 집이 26층인데 이거 안 타면 집에 못 가. 꿋꿋하게 버틴다. 할 수 없이 헌터를 뒤에서 끌어안아서 살짝 들고 겨우 탔다. 무려 23킬로다. 헉..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서 처음부터 복병을 만난 기분이었다. 날마다 산책을 하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데 어쩌나 싶어 좀 걱정이 되었지만 아마 금세 적응 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든 것은, 헌터의 성품이 워낙 유순하고 착하다는 걸 벌써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헌터는 사료를 조금 먹고 물도 마셨다. 그런데 미리 사놓은 장난감에도 흥미가 없고, 식탐도 별로 없는지 하윤이가 저녁을 먹는데도 곁으로 오지도 않고 계속 잠만 자려고 했다. 시차 때문인가 싶으면서도 한국의 보호소에 연락을 해서 물어봤더니, 원래 사료를 잘 안 먹고 장난감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잠을 많이 잔다고 했다. 입양되기 전에 고쳐 주거나 가르쳐 주어야 할 목록에 몇 가지를 더 추가했다.

자면서 안정감을 느끼라고 소파 아래에 만들어 놓은 헌터의 침대 주변에 여러개의 담요와 쿠션을 쌓듯이 놓았다. 곤하게 자는 모습이 꽤 편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첫날은 배변 주기가 파악이 안 되어서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내려가서 오줌을 누이고 왔다. 그때마다 뒤에서 끌어안고 엘리베이터를 태웠다.


둘 다 피곤한 하루였지만 별 탈없이 지나가서 뿌듯했다. 헌터는 거실에 깔아놓은 자기 침대에서 자고 하윤은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는데 혹시라도 헌터가 불편한 일이 생길까 봐 깊이 잠들지 못했다. 조용한 한밤중, 어디선가 자박자박 걸음소리가 났다. 눈을 뜨니 헌터가 침대 곁에 서서 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자다 깼는데 너무 낯설었나 보다. 하지만 강아지가 침대에 올라간다고 하면 입양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못하게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하윤은 이불을 끌어안고 거실로 나가서 소파에 누웠다. 그제서야 헌터도 바닥에 깔아놓은 자기 침대에 엎드린다.



2022년 6월 21일 화요일, 헌터의 밴쿠버에서의 첫 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이만하면 썩 괜찮았다고 하윤은 생각했다. 내일은 산책을 가야 한다. 헌터가 낯 선 거리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스럽긴 하다.



다음날 새벽, 아직 꾀죄죄하지만 그래도 어제보단 훨씬 나아보인다. 미리 사놓았던 코끼리 인형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한국에 연락해보니 원래 잘 먹지도 않고 장난감으로 노는 것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그런데 표정이 졸려서 그저 자고싶다고 말하는 것 같아 귀엽다. 어제 잠을 그렇게 자고도 또 졸린 모양이다. 그나저나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해서 걱정이다. 곧 산책 나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계속 안고 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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