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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Sep 25. 2023

산책을 빙자한 극기훈련

구월 어느 주말 아침


새벽비가 살짝 내렸던 주말 아침, 여름꽃 지는 모습이 고와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헌터를 데리고 숲으로 간다기에  아무래도 산책이 길어질 것 같아 슬쩍 꾀가 나서 둘만 보내고, 창문을 다 열고 환기를 시키며 아침 청소를 한 후에  혼자 집을 나섰다. 늘 걷는 익숙한 동네 길, 다섯 번쯤 망설이다가 평소에 그라운딩을 하는 잔디밭으로 갔다. 발이 좀 시릴 것 같았지만 조금 있으면 이것도 하지 못할 테니 하고 싶을 때 한 번이라도 더 하자. 맨발로 30분쯤 걸었다. 역시 발이 좀 얼얼하다. 햇살이 퍼지고 기온이 올라가는 오후가 아니면 이젠 맨발 걷기는 못할 것 같은데 내가 한낮에 걸으러 나올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 아침 산책이 끝나면 바로 완전 집순이 모드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나간지 한 시간쯤 지나서 집으로 왔는데 아무도 없다. 아직도? 휴.. 안 따라가길 정말 잘했네.


잠시 후에 카톡으로 문자와 사진이 온다. 숲을 지나서 하이킹 코스까지 올라갔는데 욕심내다 터닝포인트를 잘못 잡아서 그야말로 '개고생' 중이라고. 30분쯤 후에 집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쳐서 헥헥거리며 들어올 두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꾸 웃음이 난다. 나는 내 선견지명을 칭찬하며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커피를 내리면서 다시 사진을 본다.  사진 속의 이른 가을이 배시시 인사를 하네.


나도 반가워. 너 참 예쁘다.


오늘은 주말이라 여유를 부리며 아침 7시쯤 나가더니 10시가 넘어서 들어왔다. 하윤인 땀범벅에 녹초, 헌터는 겉으론 말짱해 보이는데 들어오자마자 나한테로 오더니 뭐라 뭐라 끙끙.. 엄마, 걔 아마 내가 잘못했다고 일러주는 걸 거야. 헌터가 안 가겠다고 하는 길로 들어섰다가 고생했거든 ㅎ

근데 헌터도 고단했나 보다. 사료와 오리고기 캔을 섞은 밥을 한 그릇 뚝딱 먹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바로 잠이 들었다. 우리는 스시를 배달주문 해서 따뜻하게 우려 낸 genmaicha(일본 현미녹차)와 함께 주말 브런치로 먹는다.


얘, 그런데 세 시간 동안 20.000보를 넘게 걷는 게 무슨 아침 산책이냐? 극기 훈련이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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