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서 Oct 12. 2023

올라가는 게 아니라 다행이야

토요일 아침의 화재경보 _ 헌터의 경험이 하나 늘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휴일이라 좀 느긋하게 먼 숲으로 산책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헌터에게 하네스를 막 채우려는데 갑자기 화재경보기가 요란한 소리를 낸다. 우리도 깜짝 놀랐지만 헌터는 특히 이런 소리를 무척 무서워한다는 걸 알기에 순간 당황했다. 그런데 이젠 정말 많이 변했는지 그리 놀라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더 정신이 없었다. 정말 불난 거 맞아? 아니겠지? 기계고장일까?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지만 어쨌든 경보가 울렸으니 내려가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몇 가지 중요한 서류와 물건들이 떠올랐지만 정말 불이 난 건 아닌 것 같고 이미 산책 갈 준비를 다 마친 후라서 지갑만 더 챙겨서 현관을 나섰다. 아, 잠깐만...


우리 집 26층이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할 테니 비상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아이는 헌터도 걱정, 하체 부실한 엄마도 걱정, 순간 멘붕 온 표정이다. 나야 조금 천천히 내려가면 되지만 혹시라도 헌터가 당황해서 돌발 행동을 하거나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길게 끌 상황은 아니라서 비상계단으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헌터는 생각보다 잘 내려갔다. 하지만 어느 층에서 사람들이 나올 줄 몰라서 목줄을 풀 순 없어서 헌터와 속도를 맞추느라 아이는 벌써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연기 냄새도 나지 않고 직감적으로 화재는 아니라고 확신하면서도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은 나도 모르게 빨라지고 긴장이 됐다. 그러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다치면 정말 억울하단 생각에 난간을 잡고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한국에 갈 때마다 넘어지거나 발목을 삐었던 기억은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되살아나서 방심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갑자기, 먼저 내려간 줄 알았던 헌터가 되돌아 올라와서 구부러진 계단 쪽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다.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모습이 어찌나 대견하고 귀여운지 또 감동감동.. 처음 겪는 상황인데도 뭔가 위험하거나 급한 일이 생겼다는 걸 감지하는 것 같았다.


우리 집 위로는 두 층밖에 없어선지 우리가 좀 늦은 건지 내려가는 동안 다른 사람은 없었는데 중간쯤 내려왔을 때 비상계단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젊은 인도인 부부가 보였다. 그런데 와~ 등산복 스타일로 제대로 갖춰 입은 옷에 각자 크고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하나씩 매고 누가 봐도 비상상태에 돌입한 표정으로 나를 앞질러 뛰어내려 갔다. 아마 배낭은 평소에 미리 챙겨놓는 재난대비 비상용품이 가득 든, 그런 가방일 것이다. 아, 이런 사람들이 정말 있구나... 감탄스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가.. 아차.. 헌터. 헌터와 아이는 벌써 나보다 한 두 층 먼저 내려갔을 것이다.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면 놀랄 텐데...


에라 모르겠다. 한국말 알아듣는 사람도 없을 텐데... 하윤아, 뒤에 사람들 내려간다. 평소보다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멀리서, 오케이~ 그런데 무슨 계단이 이리 많냐. 계단으로 내려가는 26층은 꽤 길었다. 끝이 보이지 않으니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미로를 걷는 것 같았다. 그것도 나름 다급하게. 폐소공포증이 약간 있는 나는 슬슬 다리보다 가슴이 답답한 걸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그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어 다 왔어. 헌터를 달래는 소리였다. 어느 순간 헌터도 평정심을 잃은 것 같았다. 그래도 처음 왔을 때는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낯선 건물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이만큼이라도 적응해서 다행이다. 사실 늘 비슷한 일상을 되풀이할 때는 헌터가 어디까지 트라우마를 극복했는지 확인하기 힘들다. 그러다 이런 돌발상황에서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며 안도한다.


나는 어느새 화재 경보 때문에 대피한다는 사실은 잊고, 헌터 때문에 빨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 보니 정말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2층 싸인이 보인다. 이제 다 왔다! 아이와 헌터는 벌써 일층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갑자기 신천지를 만난 것처럼 문 크기만 한 바깥세상이 환하다. 아니, 아름답다. 한 발자국 차이로 시원한 아침 공기와 햇살 속에 선다. 정말 무슨 큰 일을 당해서 구조된 기분이었다고 엄살을 떨고 싶을 만큼 아침 공기는 달고 햇살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소방차도 이미 와 있고, 꽤 많은 사람들이 건물 밖에 둘러서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별일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핏 봐도 건물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경보기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상황을 판단해서 행동하는 게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막상 닥치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전에는 선뜻 대피하지 않게 된다. 더구나 휴일 이른 아침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이래서 나이 들수록 땅에 가까운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내내 주택에서 살다가 이 나이에 하늘 가까이 살고 있네. 새도 아니면서..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아..


다리가 후들거려서 걸을 수가 없다. 도대체 인간의 몸은 얼마나 많은 작은 근육들로 쪼개져 있는 걸까. 몸을 꽤 움직이며 살았는데도 새로운 행동에는 꼭 새로운 근육통이 따라온다. 타고난 허약체질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것 같다.


걷다가 벤치가 보일 때마다 앉아서 쉬었는데도 조금만 방심하면 무릎이 꺾일 것 같아서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헌터와 아이를 따라갔다. 나 때문에 숲으로 가려던 계획은 취소하고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헌터가 잔디밭에서 다른 개들과 노는 동안 벤치에 앉아서 한참 쉬었다. 기특한 헌터는 - 따님께서는 다른 견주들과 담소를 나누고 계시는 동안에도-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뛰어와서 나를 살펴보고는 다시 돌아갔다. 헌터가 먼 곳으로 도망가는 줄 알고 놀랐던 다른 견주들이 사실을 알고 동시에 감탄사를 날렸다는 소식을 아이에게 전해 듣는 건 덤으로 얻은 즐거움이었다.


어찌어찌,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오면서도 내내 걱정은 단 한 가지. 만약 아직도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면 나는 차라리 거리에서 장렬히 전사하겠노라. 도저히 26층까지 걸어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럴 순 없다. 다행히 건물 밖은 조용했고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건물 안에선 금연인데 누군가가 집안에서 담배를 피워서 스모그 알람이 울린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건물인데 하지 않기로 한 것을 안 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사소한 이기심이 많은 사람들을 놀라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만든 장치를 '양치기 소년'으로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그 후 여러 날 동안, 움직일 때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의 데시벨을 낮추기 위해 입술을 깨물면서, 요즘 들어 헌터와의 새벽 산책에 빠지는 날이 많았던 게으름을 뼛속 깊이, 아니 근육 깊이 반성했다.


한편으론 인간의 몸이 너무 야속했다. 한 번 만들어 놓은 근력이나 유연성 같은 것을 절대 그대로 유지시켜 주지 않는다. 마치 끝도 없이 먹어대는 먹깨비처럼 끊임없이, 그야말로 끊임없이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항상성이 유지된다. 만들기는 어렵고 허물어지는 건 순식간인, 참 야속하고 싸가지 없는 내 몸이여.



평생 근육통은 모를 것 같은 부러운 헌터의 뒷태.



매거진의 이전글 산책을 빙자한 극기훈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