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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Nov 02. 2023

헌터의 보호색은 가을색

happpy frost & unhappy halloween



#서리 내린 아침


창밖은 아직 어둡습니다.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우리를 깨우려고 자박자박 집안을 돌아다니는 헌터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옷을 갈아입다 말고 폰으로 날씨를 확인합니다.105년 만에 기록을 깰 정도로 갑자기 추위가 찾아와서 북쪽의 어느 도시는 영하 8도를 찍은 곳도 있다는 뉴스를 봤거든요.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온화한 날씨를 가진 BC주, 그것도 광역밴쿠버 지역인데 10월 말의 날씨가 초겨울 같습니다. 해뜨기 전후가 가장 추운데 딱 우리의 산책 시간입니다. 며칠 동안 아침 최저기온이 1도 근처를 머물더니 기어이 빙점을 기록하네요. 아직 꺼내놓지 않았던 긴 패딩을 찾아입고, 장갑까지 끼고 집을 나섭니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아 달을 보며 걷는 길, 보름 근처인가 봐요. 둥근 새벽달이 참 예쁩니다.


우리에겐 좀 당황스러운 추위지만 헌터는 아주 좋아하는 날씨지요. 서리가 내려서 잔디밭 위에 쌀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거든요. 물기 먹었던 땅이 얼어서 딱딱하게 결이 잡혀있습니다.. 여름에 스프링클러가 적셔놓은 잔디밭엔 절대로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서리가 내린 잔디밭은 좋아합니다. 개공원에서 실컷 뛰어놓고, 친구들도 많이 만난 즐거운 아침이었어요.




#할로윈이 싫어요


헌터가 일 년 중 가장 싫어하는 3일이, 캐나다데이, 할로윈, 새해전야입니다. 불꽃놀이와 폭죽 때문이죠. 할로윈 데이였던 어젯밤엔 유난히 오래도록 폭죽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창밖으로 멀리 불꽃놀이들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영화든 책이든 공포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예 곁눈질도 하지 않는 데다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 할로윈도 싫어합니다. 개를 키우면서부터 더 싫어졌지요. 개들은 폭죽소리를 아주 싫어하거든요. 이웃에 사는 '루시'도 한국에서 데려온 입양견인데 작년에 할로윈 후로 몇 주동안이나 산책을 안 하려고 해서 애를 먹었답니다.


헌터는, 폭죽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니까 현관 쪽으로 갑니다. 기역자로 구부러지는 짧은 복도 끝이라 우리 집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거든요. 그러더니, 늦게 퇴근해서 막 저녁을 먹으려는 하윤에게 이리로 오라고 온몸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결국은 둘이서 현관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는... 아이도 한 그릇에 음식을 모두 담고, 헌터도 밥그릇을 옮기고... 땅거지가 따로 없습니다. 같이 밥 먹고, 음악 듣고, 헌터는 아이의 무릎에 얼굴을 올리고 잡니다. 피곤할 텐데도 헌터가 깰세라 움직이지도 않고 책을 읽다 폰으로 영상도 보며  두 시간이 넘게 앉아있습니다. 아가 키우는 엄마나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잠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가서 오줌을 누고 와야 하는데 여전한 폭죽소리에 놀라서 정신이 없는 녀석을 간신히 달래서 볼 일 보고 들어왔습니다. 다행히 밤 11시쯤 조용해졌어요.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견디는 일은 늘 힘듭니다.


이제는 예전 같진 않지만 그래도 할로윈이 다가오면 집 안팎을 장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이었으면 무서워서 깜짝 놀랐을 장식도 있지만 아침 산책길에 만나는 할로윈 장식은 나름 귀엽고 재밌요. 제가 할로윈에서 유일하게 즐기는 부분입니다.



깜짝 놀라셨죠? ㅎㅎ 작년에 아이가 만들었던 할로윈 파이입니다. 이렇게 생긴 음식을 어떻게 먹냐고요~  끝내 안 먹겠다고 버티다가 형체를 알아볼 수없을 정도로 잘라놓은 후에 한 조각 먹었습니다. 올해는 바빠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었어요. 



#헌터의 가을


다행히 오늘 아침엔 기온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맑은 날은 춥고, 비 오는 날엔 오히려 기온이 올라가는 이곳의 날씨답게 내일부터 내내 비소식이네요. 금세 또 가을 지나고 겨울 되겠지요. 비만 오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헌터가 좋아하는 날씨인데, 세상에 다 좋은 건 없나 봐요. 하지만 단풍은 여전히 곱고 이른 아침의 쌀쌀하고 청량한 공기가 사랑스러운 날들입니다. 이럴 땐 헌터의 걸음이 가볍게 통통 튑니다. 보드라운 귀도 팔랑거리고. 병원 갔을 땐, 간호사분들이 벨벳 같다며 자꾸 만져보고 싶어 했는데 엊그제 지나가던 어떤 꼬마가 나비 같다고 했어요. 순한 성품이 드러나 선지 헌터는 낯선 사람들에게도 예쁨 받으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숨은 그림 찾기.. 헌터는 어디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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