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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Dec 03. 2023

백색 소음이 된 삼국지

편하냐?



백색 소음이란, 주파수 스펙트럼이 일정한 소리를 말하며 심신의 안정이나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공기 청정기나 냉장고, 선풍기 등이 만들어 내는 소리나 자연의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등이 백색 소음이다. 하지만 나는 소리에 예민한 편이라선지 인공적인 소리에서는 백색 소음의 효과를 느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오래전에 로버트 풀검의 책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음계를 갖고 있는데 자신은 B 플랫이고 냉장고 소리도  B 플랫이라면서 자신이 부엌에 앉아있으면 마음이 편한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그는 부엌에서 야식 먹는 걸 즐겼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특별한 대화를 하지 않아도 편하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우리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음계가 닮은꼴이기 때문일수도 있다.  백색 소음의 효과도 이와 비슷해서 누군가에겐 효과가 있고 나같은 사람에겐 그저 소음일 뿐인건 아닐까?


요즘,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삼국지'를 오디오 북으로 듣는 중이다.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들어보자면서도 네 번이나 포기했었는데 결국은 이미 절반쯤 들었다. 사실 뜨개질을 하지 않고 온전히 오디오북만 듣는다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삼국지는 뜨개질하면서 듣기엔 최적의 소설이다. 별 감정의 개입 없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타인의 수다를 흘리듯이 듣고 있는데 가끔 기가 막힌 표현도 나오고 어릴 때 소년 삼국지였나.. 만화로 된 삼국지를 봤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라서 어느새 그들의 외모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도 있다. 30%의 허구가 포함된 책답게 가끔, 뭐 이런.. 어이없는..의 상황도 있지만 애당초 감정이입이 없었으니 그러다 만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오디오 북  '삼국지'의 최대 수혜자는 뜨개질하는 내가 아니라 헌터인 것 같다. 내가 집안일을 하면서 사부작 거리거나 복도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고개를 번쩍 들고 집중하고 가끔 그르릉 거리며 현관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데 그럴 때 삼국지를 틀어놓으면 금세 제자리 돌아온다. 몇 분 후에 보면 완전히 편한 자세로 누워서 낮잠을 즐긴다. 어쩌나 보려고 오디오를 끄면 금세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하다가 다시 틀면 이내 머리를 털썩 쿠션에다 떨구고 잔다. 그러니까 삼국지는 헌터에게 완벽한  백색 소음인가 보다. 일주일에 두 번씩 아이가 출근하는 날엔 창 넓은 거실에서 둘이 이렇게 낮 시간을 보낸다.


엄마는 뜨개질을 하시오 나는 삼국지를 듣겠소.


아마 낭독해 주시는 분의 목소리 덕이 클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을 어설프게 표현하지도 않고 발음이 명확하면서도 목소리 톤이 좋아서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내가 오디오북으로 책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목소리다. 들을 때마다 고마워서 언젠가 댓글을 한 번 남겨야 하나.. 고민할 정도다. 아마 헌터는 몸속에 나와 비슷한 음계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아른아른한 햇살을 받으며 늘어지게 자는 녀석을 보면 귀엽고 안심이 되다가도 슬그머니 드는 유치한 생각이 있다. 저 소파.. 원래 내 건데....  좀 낡긴 했어도 앉는 자리가 앞으로 넓고 평평한데다 팔걸이 부분도 평평해서 쿠션을 놓거나 발을 올리기 좋았다. 등을 기대고 누우면 침대보다도 편하고 잠이 잘 왔다. 회사를 그만 두기 전 일 년 정도, 빈 시간엔 무조건 마치 합체된 듯 저 소파에 누워서 아이패드로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보다 졸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었다. 짧지만 단잠을 자는 것도, 그래서 또다시 겨우 인간 구실을 할 만큼 움직이게 하는 것도 저 소파 덕분이었다. 그랬는데..


이젠 헌터의 침대다. 수시로 털을 치우고 빨기 위해 구색 안 맞는 러그나 면 시트를 깔아놓아서 거실에서 가장 볼품없는 곳이 되었고, 털썩 주저앉거나  잠깐 누우면 너무 편했던 그 맛을 아직 다 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헌터가 좋아하니 그거면 됐다.


임시보호를 할 때는 혹시라도 입양되어 갈 집에서 싫어할까 봐 소파나 침대에는 못 올라가게 했더니 바로 알아듣었는데 몇 달 후 우리가 입양하고 나서 한 번의 손짓으로 헌터는 소파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내가 맨날 빙구 표정을 놀리지만 사실 헌터는 꽤 똑똑하고 훈련의 효과가 금세 나타나는 녀석이다. 가끔 헌터한테 소파를 빼앗겼다고 장난을 치지만 이제  저 소파가 없어도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여유로운 생활인 것도 좋고,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등을 대고 옆으로 누워 다리도 쭉 뻗고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자고 있는 헌터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달콤한 한숨을 길게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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