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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an 30. 2024

요리에 진심인 그녀의 레시피 _ 비프 보르기뇽

Julie & Julia, 2009 / 쥴리 앤 쥴리아


우리의 옛말 중에 '예쁜 여자는 소박을 맞아도 음식 솜씨가 좋은 여자는 소박을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여자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던 시절에 생긴 말이긴 해도 한편으론 웃으면서 쉽게 수긍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을 단순하게 분류하면 의식주 세 가지니, 아무리 삶의 방식이 달라졌다 해도 먹거리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는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불변의 사실이 아니더라도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먹는 행위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감정과 대화들을 떠올린다면 삶에서 차지하는 음식의 지분은 상당할 것이다.


이민 초기에 티비에서 우연히 어떤 요리쇼를 보았는데 요리사가 굉장히 키가 크고 나이가 많으신 여자였다. (그녀는 1921년 생이신데도 키가 188센티였다니 굉장히 큰 키다.) 한국의 반질반질한 요리프로에 익숙했던 터라 '방송용'이라고 하기엔 뭔가 낯설고 부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더구나 요리사의 목소리가 결코 듣기 편한 억양이 아니었지만 뭔가 아우라가 있어서 인상적이긴 했다. 그 후로 한두 번쯤 스치듯 보았지만 그땐 그분이 유명한 요리사라는 사실을 몰랐다. 어쩌면 자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보았을 수도 있지만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였으니 이름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진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영화, 줄리 앤 줄리아(Julie & Julia)를 보면서, 정확히 말하면 줄리아역의 메릴 스트립의 연기를 보면서 바로 그녀가 떠올랐다. 사실 얼굴은 그리 닮지 않았지만 메릴 스트립이 원래보다 덩치를 부풀린 것도 그랬고(그녀는 이 영화를 위해서 15파운드 정도 살을 찌웠다고 한다.) 특히 말투 때문이었다. 비로소 그녀가 524개의 프랑스 요리를 영어로 쓴 독보적인 요리책( 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 1961)의 저자인 '줄리아 차일드'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영상으로나마 실제의 줄리아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영화 속의 캐릭터가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늘 그렇듯이 흠 없이 훌륭해서 이십여 년쯤의 세월을 순식간에 끌어당기며 바로 줄리아,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줄리아 차일드의 억양은 미국과 영국의 중간쯤 되는 악센트로 mid-atlantic accent 혹은 transatlantic accent 라고 부르는, 캐서린 헵번이나 게리 그랜트 같은 흑백영화 속 배우들의 억양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처음 봤던 줄리아 차일드는 그녀가 한창 쿠킹쇼를 하던 50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쿠킹쇼에 출현한, 훨씬 더 나이가 드셨을 때였다. 그래서 흑백필름인 그녀의 쿠킹쇼를 몇 개 찾아봤다. 영화 속에서 메릴 스트립이 실제 요리쇼를 그대로 재현한 모습이 있어서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다. (달걀 요리할 때 뒤집다가 일부가 떨어졌는데 다시 프라이팬에 주워 담아 다독거리면서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 괜찮다며 웃는 장면 )





이 영화는 40여 년 전에 발간된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을 보고, 뉴욕의 퀸즈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인 줄리365일 동안 524개의 요리를 만드는 프로젝트(The Julie / Julia Project)를 블로그에 올리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줄리의 현재와 줄리아의 과거를 오가며 각각 다른 그녀들의 꿈과 고민과 좌절과 극복과 사랑을 보여준다.


세대가 다르다고 할 만큼 시간차가 있는 그녀들이지만 꽤 많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름도 철자 하나만 다를 뿐 비슷하고, 각각 요리사와 블로거가 되기 전부터 요리를 좋아하고 잘 했으며, 각자 삶의 정체기 같은 시기에 마치 돌파구처럼 요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줄리아는 대사관 직원인 남편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행복하지만 안정감은 없는 생활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중이었고, 줄리는 자신의 글을 출판하는 꿈을 갖고 있지만 911에 관련된 사람들을 위한 콜센터의 전화 상담원이고, 친구들의 사회적 성공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 개인적으로 그녀들의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하는 - 그녀들을 지지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다.


줄리는 줄리아를 흠모해서 그녀가 자신의 블로그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언급을 하거나 직접 만날 수 있기를 바랐지만 뉴욕타임스에 줄리의 블로그에 대한 기사가 나고 유명해진 후에도 끝내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줄리아가 줄리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나도 좀 의외란 생각이 들긴 했다. 자신의 요리책에 담긴 524개나 되는 프랑스 요리를 일 년 안에 모두 만들어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격려(?) 차원에서라도 한 번쯤 만나주는 게 훈훈한 그림이 아닐까? 하지만 영화를 계속 보면서 줄리아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어쩌면 줄리아가 보기에 줄리는 자신의 요리를 사랑해서 요리책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요리보다는 '블로그'에 방점을 찍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신이 8년 동안 식재료 하나하나를 조사하고 전문가를 찾아가 조언을 듣고 완벽한 레시피를 위해서 한 가지 음식을 수십 번씩 만들어 보는 열정적이고 힘든 과정을 거치며 어렵게 요리책을 만든 이유는, 물론 그 과정을 즐기기도 했지만 평범한 미국 사람들이 프랑스 요리를 잘할 수 있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가족이나 손님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데 자신의 요리책이 도움이 되는 건 행복하지만, 줄리는 '블로그'라는 매체를 통해 유명해지고 싶어서 자신을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싫었을 수도 있다. 줄리는 이 블로그 덕분에 책을 내고 영화까지 만들며 유명해졌으니 결과적으로 상업적으로 이용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아무리 줄리아의 음식을 따라 해도 그녀의 낙천적이고 다정한 심성을 닮진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듯이 줄리는 줄리아를 존경했다. 또한 이런 프로젝트를 생각해 낸 아이디어도 좋고,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피자가게 이층에 있는 살림집의 작은 부엌에서 일 년 동안 524개의 프랑스 요리를 한다는 건 금전적으로나 시간적, 체력적으로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줄리도 찬사를 받을만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재료는 '버터'라고 말한 줄리아, 끝내 그녀를 만나지 못한 줄리는 상설전시되어 있는 '줄리아의 부엌'을 찾아가 그녀의 사진 앞에 몰래 버터 한 덩어리를 올려놓는 것으로 존경하는 마음과 감사를 표시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줄리아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인 2004년에 돌아가셨다.


사실은 여기서 글을 맺으려다가 실화가 바탕이니 영화 밖의 이야기도 궁금해서 바이오그라피와 기사 등을 몇 개 찾아보았다. 줄리아는  간절히 원하던 아이는 끝내 갖지 못했지만 남편과 요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다가 92세의 생일을 이틀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남편은 10년 전에 먼저 죽었지만 그도 역시 92세까지 살았다. ) 남편 역의 '스탠리 투치 Stanley Tucci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다. 그가 지닌 깔끔하고 댄디한, 그러면서도 은근히 다정하고 침착한 분위기가 좋다. 이 영화에서도 그랬다. 다소 과장된 말투나 허둥대는 행동이 필요했던 메릴 스트립의 연기를 적당히 쿨 다운 시켜서 함께 어우러지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줄리아의 편집장인 Judith가 어느 인터뷰에서 줄리의 블로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줄리아와 나는 요리를 하면서 네 글자의 단어가 함부로 튀어나오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Flinging around four-letter words when cooking isn't attractive, to me or Julia,)

영화에도 나오지만 줄리는 요리할 때 어렵거나 자신의 뜻대로 잘되지 않으면 F***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자주 쓰는데 블로그에도 썼던 모양이다. 줄리아가 자기를 싫어하는 이유가 자신이 욕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라는 줄리의 대사도 있는데, 영화를 볼 때는 뜬금없는 소리 같았지만 이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나서 나름 근거 있는 추측이었단 걸 알았다. 또한 줄리아는 줄리가 인기를 위해 묘기를 부리듯 요리를 해서 싫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요리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가 다르다고 느낀 줄리아는 그게 못마땅해서 줄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150만 부 이상이 팔린 줄리아의 첫 요리책은 여전히 인기가 많고 이 책 외에도 7권이 더 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줄리아'라는 티비 시리즈도 방영되고 있다. 사실은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예전에 영화 속에서 보았던 요리가 떠올라서 다시 보게 되었는데 레시피를 검색하며 관련된 글들을 읽다가 뜻밖의 기사를 발견했다. 줄리 (Julie Powell)가 202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49살이었다니 안타깝다. 블로그 덕분에 사회적인 영향력이 생기고 책도 내고 영화도 만들어졌지만 온전한 자신의 이야기라 할만한 두 번째 책은 이런저런 이유로 호평을 받진 못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그녀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 좀 이르다싶게 세상을 떠난 그녀, 그래도 죽기 전에 바라던 것을 얻었으니 행복했을까? 인생이란 게 에피소드 같은 몇 번의 좋은 일로 지속 가능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영화 밖의 사실을 알고 나니 선뜻 단정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행복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영화속의 그녀는 해피앤딩이었으니까.



사소한 끌림 _ 비프 보르기뇽 boeuf bourgugnon


영화에서 줄리아의 원고를 받은 출판사의 편집장은 줄리아의 요리책이 지닌 성공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줄리아의 레시피대로 직접 요리를 해봅니다. 그때 그녀가 선택한 요리가 '비프 보르기뇽'이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보고 바로 출판을 결정합니다. 40년 후에 블로거인 줄리가 이젠 노인이 된 그 편집장과 만나기로 했을 때 준비한 요리이기도 합니다. 아마 줄리아의 요리책에서 가장 잘 알려진 레시피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갈비찜과 비슷해 보이지만 맛이 궁금해서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그동안 식구들을 위해 꽤 많은 음식을 만들었는데 프랑스 요리라 할 만한 걸 만든 적은 없더라고요. 우선 오랜만에 무거워서 잘 쓰지 않는 더치 오븐(iron pot)부터 꺼냅니다.


결론은, 조금 망했습니다. 살짝 오버 쿡... 소스가 너무 졸았어요. 어려운 요리는 아닌데 재료가 따로따로 손이 가는 과정도 꽤 있습니다. 요리 블로거가 아니라서 재료나 요리 과정 설명이나 사진은 없습니다. 사실 사진 찍을 생각도 안 하고 만들었거든요. 혹시 저처럼 맛이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에 레시피가 있으니 찾아서 해보세요. 조리 시간이 말해주듯이(볶는 과정 끝나고도 오븐에서 2시간 이상) 슴슴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맛에다 비주얼도 포토제닉상은 못받게 생긴 그야말로 집밥같은 요리입니다. 만드는 내내 집 안 가득 맛있는 냄새가 뭉근하게 가득 차는 건 애피타이저고요. 이 요리에는 와인이 거의 한 병 다 들어갑니다. 재료 준비할 때 조금 저렴한 와인을 사용하세요.


요리에 사용한 와인


제가 좀 늦은 오후에 요리를 시작해서 오븐에 넣고 기다리는 동안, 아침에 만들어 먹은 김밥 재료가 남아서 다시 말아 저녁으로 먹고 말았어요. 그래서 정작 요리가 완성되었을 때는 제대로 차려서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사진은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조금 만들어 둔 매쉬드 포테이토와 한 접시 만들어서 와인 곁들여 아이와 함께 나눠먹었습니다. 너~무~ 맛있진 않은데 자꾸 손이 가는 맛이랄까요? 인터넷에서 이 요리를 해서 먹어보고 더 이상의 레시피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아마 한국의 갈비찜을 먹어보지 못해서 그럴걸?이라며 놀리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줄리아가 요리쇼를 끝내면서 늘 하던 말을 저도 외쳐봅니다. 오늘 무슨 음식을 드시든, 맛있게 드세요.


Bon appet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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