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바탕색은 이해다
다른 주나 외국에 사는 사람들이 어디야 사냐고 물어보면 이해하기 쉽게 '밴쿠버'라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사는 곳은 밴쿠버가 아니고 광역 밴쿠버의 한 도시인 ''폿 무디 Port Moody'다. 밴쿠버 다운타운과는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데다 그쪽에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는 지역에서 모든 걸 해결하며 살 수 있으니 특별한 볼 일이 생기기 전에는 거의 갈 일이 없다.
언젠가 컨벤션 센터에 갈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다운타운에 갔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지나게 되는 거리는, 다운타운의 그늘이라고도 할 수 있는 '헤이스팅 스트릿'이다. 이민 초기부터, 직접 보거나 당한 것도 아니면서 마약과 부랑자, 범죄의 대명사로 먼저 인식되던 거리 이름이기도 하다. 일 년에 한두 번쯤 이 거리를 지날 때면 차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 전체에 풍기는 낯설고 험한 분위기 때문에 약간 불안했다. 오늘도 여전히 반사신경 같은 사소한 불안이 일었고 그 불안이 지나친 건 아니라고 변명하듯, 우리 동네에선 보기도 힘든 경찰차가 블럭마다 한 두대씩 정차해 있었다.
대낮인데도 술인지 약물인지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 가로수 아래서 훌훌 옷을 갈아입는 남자, 거의 벗다시피 한 기괴한 옷차림으로 마치 연극배우처럼 드라마틱한 표정과 몸짓의 젊은 여자, 막 경찰에 체포된 듯 수갑이 채워지고 있는 사람, 카트에 뭔가를 가득 싣고도 모자라서 터질 것 같은 비닐봉지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걸어가고 있는 사람, 지저분한 낙서가 있는 낡은 건물의 뿌연 유리창으로 반사되는 지친 햇살, 등으로 살짝 현기증이 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이 모든 것이 그리 오래 불편하진 않았다. 오히려 잠깐의 불안이 지나가자 거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냄새를 풍기며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이런 무질서 또한 다른 형태의 질서라는 설명을 듣는 것 같았다. 나는 알아챈다. 이 거리가 무조건 불편하고 무섭기까지 했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움직였다는 것을. 이런 식의 심리적 경험을 할 때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의 육체가 변하는 만큼 마음도 꽤 복잡한 변화의 단계를 거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마 그건 신체적인 활동의 종류나 주변 환경과 무관하지 않은 변화일 것이다.
난생처음 하는 힘든 육체노동으로 생활을 이어가던 이민 초기엔, 멀쩡한 몸과 말을 사용하면서도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곱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들이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 그들의 생활방식은 유죄였다. 그 이면에 있을법한 개인적인 고통이나 사정 따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야 10년 20년이 지났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일로 부대끼고 놀라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사노라면 나와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어지간하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생각에도 근육과 굳은살이 생긴다.
누군들 당당하게, 사회의 흠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살고 싶지 않겠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으로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향해 내가 정한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댄다는 건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가.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대를 향한 연민과 관심 인지도 모른다. 문득, 아침에 읽었던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서 만난 한 문장이 떠올랐다.
다가오는 인기척, 그것이 인간의 희망인 것이다.
소방관들의 이야기였다. 그가 가슴이 뻐근했다는 부분에서 나도 그랬고, 그가 울었다는 부분에서 나도 눈물이 났다. 불속에 고립되어 있는 사람을 향해 소방대원들이 구출을 오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로 읽혔다. 인간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기척, 그것이 인간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전혀 부족함 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든 거리의 노숙자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든 오직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사람이든 결국 인간의 소망은 인간이 아닐까.
그런 중에도 익숙치 않은 일상을 가까이서 보는 일은 살짝 긴장감을 불러온다. 나도 모르게,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앞으로는 어쩌려고 저러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들이 걱정처럼 떠오르는 걸 아예 막을 순 없었다. 나는 그런 가치관과 편견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부족해도 할 수 없는 내 한계다.
차가 이동하는 불과 몇 분 사이에 도시는 표정을 바꾼다. 마치 연극무대의 막이 바뀌면서 무대 장치도 바뀐 것처럼 거리가 분주하고 환해진다. 도도하게 반짝거리며 어깨에 힘을 주고 있는 높은 빌딩과 깨끗하고 반듯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가죽으로 만든 숄더백이나 서류가방, 테이크아웃 커피잔 같은 것들을 일상의 도구처럼 든 말끔한 얼굴의 사람들이 꼿꼿하게 등을 펴고 걷고 있다. 그들은 바쁘게 보이기에 충분할만큼 날렵하게 움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보폭과 느긋한 우월감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발전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이렇게 야누스처럼 두 개의 다른 얼굴로 존재한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범답안을 내듯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이라고 쉽게 말해지지는 않는다. 물론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화려한 빌딩과 지저분한 뒷골목이라는 이분법으로 분류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 사이에서 공존하는 수많은 다른 삶의 방식들이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그 눈물겨운 다양성에 대해서 새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인간은 행복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단지 주어진 자신의 길을 가려고 사는 것이다'라는 '롤랑'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마음속 행복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세상을 바꿔놓거나 인류를 발전시키는 일은 정말 잘난, 그런 일을 할 능력과 소신이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테니 나는 적어도 누군가를 모함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함부로 낮춰보지 않고, 대가 없이 따뜻한 말씨와 미소를 건넬 줄 알고, 상대적인 빈곤이나 박탈감으로 자신을 잃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사람으로만 살아갈 수 있어도 좋겠다. 요즘엔 이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세련된 건물과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풍성한 자연까지도 사람들 덕분에, 그들이 내는 인기척으로 인해 더 아름답고 존재의 의미가 자란다. 새삼 큰 도시가 빚어내는 공존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공존의 바탕색은 이해일 것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 이토록 든든하고 자존감을 세워주는 말이었단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