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에 미농지를 붙여놓은 것 같네.
며칠 동안 아침 안개가 짙었다. 마치 창문에 미농지를 붙여놓은 것처럼, 늘 보던 너른 풍경이 숨은 아침이면 이상하게 어디선가 뭉근하게 끓인 뭇국 냄새가났다. 심지어 뭇국의 뜨거운 온도까지 촉감이 아니라 향기로 느껴졌다. 그러더니 한 사나흘 앓았다.
시간 맞춰 에드빌을 두 알씩 삼키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보내다가 어지간히 견딜만해졌을 땐 랩탑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보며 자다 깨다를반복 했다. 그러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라서 유튜브에서 5달러를 주고 렌트를 했다.
Attila Marcel
한국어 제목은 '마담 프로스트의 비밀정원', 직역이 아닌 한국어 번역의 책이나 영화의 제목은 늘 원제보다 감각적이고 아름답다.
기억의 왜곡, 그로 인한 오해와 슬픔, 트라우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들, 위로, 아스파라거스 티(아픈 기억을 불러내는 매개체인 동시에 그 나쁜 기억들이 씻겨나가듯 역한 냄새의 오줌을 누며 기억이 지워진다는 설정은, 아스파라거스를 먹고 나면 오줌에서 특유의 진한 냄새가 난다는 걸 알고있는터라 기발한 선택이었단 생각이 든다.), 차의 쓴맛을 중화시키는 마들렌과 프로스트의 효과...
다시 본 영화는 처음에 내가 보고 느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첫 마음이 놓친 것은 없었다는 확인과 두 씬쯤 잊고 있었던 다정함을 발견해서 즐거웠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가서 쿠킹 도구를 뒤적거린다. 갑자기 마들렌을 굽고 싶다.
마들렌은 재료나 만드는 과정이 과정이 간단한 편이다. 그런데도 자주 굽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구웠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어쩌면 마들렌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예술적인, 혹은 정신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시간 정도 냉장고에서 재웠던 반죽을 꺼내서 틀에 담고 오븐 시간을 14분에 맞춘 후, 마들렌이 구워지는 동안 '미셀 투르니에'의 예찬을 읽는다.
시간보다 공간이 더 중요하다. 눈이 왕이다. 눈이 마음보다 더 중요하다. 미묘한 심리학이나 축축한 내면 생활 같은 것은 알 바가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들이 짧은 몇 문장 안에 다 들어있다.
나는 한창인 칠월에 멋지게 자란 자작나무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땅에 발목이 잡혀 있는 모든 식물이 필경 시달리고 있을 강박관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씨앗들이 널리 흩어지게 할 수 있을까? 폭발. 작은 날개. 인간이 위장 속에 담아 실어 나르는 맛있는 과일, 양털과 목동의 옷에 달라붙는 갈퀴 달린 씨앗 등 땅속에 뿌리 박혀 살도록 운명 지어진 식물의 저주를 피하기 위한 온갖 방법들이 다 조사되어 있다.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물과 사람에 대해 낯설게 보기 혹은 새롭게 보기를 또 배운다. 남아있는 책갈피 속에는 어떤 문장들이 숨어있을지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그런데 마들렌은 조금 탔다. 시간을 정확히 쟀는데도 탄 이유는 이사 온 후로 마들렌은 처음 굽는 거라 오븐과 친해지지 못한 탓이다. 영화 속처럼, 좋아하는 잔에 차를 담고 곁에 마들렌 한쪽 놓은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마들렌이 타기도 했고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귀찮아서 사진을 찍다가 그만둔다. 요즘 자주 이런다. 하지만 나는 좋은 변화로 이해하기로 한다. 하기 싫거나 힘든데도 미련하리만치 끝내려고 애를 쓰던 나를 이제 좀 풀어주고 싶다. 내가 농담으로 사용하길 좋아하는 영화 대사, 할 만큼 했다 아이가.
마들렌을 12개 구워서 아이와 함께 야금야금,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먹어치웠다. 마들렌에 들어간 흰 설탕과 버터의 양을 생각하면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며 마주 보고 낄낄대다가 마들렌을 자주 굽지 않았던 현실적인 이유가 떠올랐다.
가을은 늘 우기와 함께 시작되어서, 성성한 가을빛으로도 낙엽이 되는 단풍이 아쉬우면서도 그 '웅숭깊어'가는 가을이 참 좋았는데 올해는 늦어진 비로 가을에게 그런 칭찬을 건넬 틈도 없이 겨울이겠다. 올겨울, 너무 춥진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