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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도 없는 계절에 살고 있었다

김은자 시집_붉은 작업실_내가 사는 계절

by 윤서



흐리고 온화한 날씨가 계속되는 1월, 오늘 아침 공기는 좀 차더니 한낮엔 모처럼 햇살이 좋았지. 이런 날이면 집안 가득 주체하기 힘들 만큼 햇살이 넘쳐서,난시가 심한 나의 가시거리는 함부로 헝클어지지만, 어쩐지 아까워서 블라인드를 내리진 않아. 마치 일억오천만 킬로미터 밖에서 지구를 찾아온 이 햇살처럼 이제서야 나를 찾아낸, 어슬렁거리는 시간의 팔짱을 끼고, 수많은 주인 있는 언어들 앞에 서는 시간. 아, 빨간색은 햇살이 닿으면 쉽게 색이 바래지. 붉은 표지와 어울리는 제목, 붉은 작업실. 언니의 시집이었어. 괜히 미안하대. 언니의 의욕적인 계획과 호의를 거절했던 것, 그러고도 너무 오래 연락하지 못한 것. 나는 왜 그리 늘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살았던 걸까. 내 고단한 슬픔의 무게는 도저히 덜어지질 않았어. 낡은 슬픔이 떠나면 이내 새 슬픔이 와 앉아서 무게는 늘 똑같았지. 그래서 나는 여전히 기울어져 있었지만, 그것도 나름의 균형이라고 살아갈만했지. 하지만 깃털 하나라도 보태지면 이내 무너질 걸 난 알았어. 언니의 삶은 너무 균형 잡히고, 시어들은 촘촘하면서도 화려했고, 서울 양재동의 어느 시상식 디너에서 처음 만난 이후부터 줄곧, 언니의 나이테엔 사소한 균열조차 들켜지지가 않았지. 언니의 가뿐함이 무게로 얹혀져 나를 허물어지게 할까 봐, 그래서 그랬어, 그땐. 내가 말했었나? 난 언니의 시 중에서 이 시가 참 좋다고.아마 안 했을 거야. 언젠가 뉴욕에서 만나도 이 얘기는 하지 않을 거야. 그냥 아무 연락도 없이 가서, 무작정 전화를 할까 해. 마치 지난 주말 저녁에 동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만나서, 반가워 손 한번 잡고, 아쉬움도 없이 각자의 저녁식탁으로 헤어진 사람들처럼.



내가 사는 계절 _ 김은자


여름이 채 떠나기도 전

귀뚜라미 한 마리 싱크대 밑으로

스며들어 밤마다 운다 여름내

더운 국수를 끓여내던 부엌에는

귀뚜라미 울음이 앞치마처럼 걸려 있고

가장 어두운 곳에 뿌려진 울음 하나

나는 가을 옷을 입고

낙엽 밟는 소리로 밥을 짓는다

사르륵 사르륵 밥 짓는 연기에

마로니에 잎이 흔들릴 때마다

흔들린 것들은 울음을 가지고 있다고

이름 지어주면서, 깊어지는 것들은

흔들린 사유라고 기록하면서 후욱-

저녁을 끈다

내 안이 환해진다 어둠 속에서

울음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울음은 들꽃을 닮았다

울음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나는 꺾지 않으리라

꽃잎의 수를 세던지 꽃잎

남아있는 사연을 바람에 따라 적으며

울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리라

여름의 귀퉁이를 갉아 먹는 벌레 소리에

맑은 저녁상을 차리는 밤

나는 아무도 없는 계절에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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