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나를 속이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1월, January는 라틴어로 문(門)을 의미하는 'Janua'가 어원이라고 한다. Janua는 로마의 '문의 신'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야누스(Janus)다. 하나는 미래를 보고 하나는 과거를 본다고도 하고, 행운과 불행, 혹은 전쟁과 평화 등, 동시에 양면성을 지님을 뜻한다.
'문'이란 의미 때문에 새해를 연다는 뜻으로 또는, 여러 가지로 처음이란 의미를 가졌기에 1월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로마력에선 3월을 첫 달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의 9월인 September는 라틴어의 7(septem), October는 8(oct), November는 9(novem), December는 10(decem)에서 유래된 단어다. 그러니까 로마력의 순서대로라면 January는 11번째 달이 된다.해도, 우리에게 1월은 여전히 한 해의 첫 달이다. 지켜지지 못할 거라는 쪽에 오백 원을 걸어도 좋을 다짐 따위가 예쁘고 기특한 척 가슴에 똬리를 틀어도 기꺼이 속아줄 수 있는 것도 1월의 미덕이다.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달, 1월의 어원이 야누스와 연관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한계를 위로하는 배려가 될 수도 있다. 요즘엔 항상 가까운 곳에 휴대폰이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쉽게 날짜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으니 벽에 달력을 걸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부터도 벽에 거는 달력을 잊고 산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렇지만 새 달력을 걸고, 빳빳하고 반질거리는 첫 장, 1월을 바라보며, 설령 거창한 계획은 없다 하더라도 지나간 해의 반성 위에 새로운 다짐을 얹는 건,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본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새 달력을 벽에 거는 행위를 생략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되풀이된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그 새롭던 기운은 풀이 죽고 때가 타기 시작한다. 의식하지 못하면서, 혹은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 하면서 또 그저 그런 날들을 살아간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에게 이게 인생이라는, 씁쓸한 위안을 갑옷처럼 무겁게 입히는 것이다. 이런 우리에게,
삶이란 원래 야누스처럼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서 언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얼굴을 불쑥 내밀지 모르지만 그건 당신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니까 기죽거나 절망하지 말라고, 또 당신이 원하는 남아있는 다른 얼굴도 언젠가 불현듯 찾아올지 모르니까 희망을 버리지도 말라는 위로를 건네기 위해 January가 1월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긍정적인 풀이가 되려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뭔가 결정적으로 달라지지도 않고 늘 비슷한 날들이 되풀이되리란 것을 알지만 아직은 무심하게 지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아이들의 겨울방학 계획표 같은 결심을 몰래 마음속에 숨겨둔다.올해도 두 가지쯤 챙긴다. 한 가지는 시작하면 아마 끝을 볼 테고, 나머지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떠올린다. 딱 한 가지만 생각하려고 한다. 상대방은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관계'와 그 관계의 '표현'방식에 불순물을 숨겨놓지 않겠다. 다른 사람들도 내게 그랬으면 좋겠다. 어떤 관계는 제법 반짝이며 부유하는 불순물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고립, 혹은 단절 같은 적막한 단어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거짓으로 변질되기 쉽다. 타인의 거짓은 단지 나를 이용하려는 얕은수에 불과하니 결국엔 나를 속일 수 없다. 언제나 나를 속이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네이티브 인디언 '아리카라'족은 1월을,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이라고 부른다. 타인으로 인해 어지러운 마음의 표피가 아닌 바로 내 마음의 속살, 마치 아무런 표시도 해 놓지 않은 새 달력처럼 아직 아무도 들여놓지 않아 나만 머무는 그곳에 앉아서, 지금부터 내가 데리고 갈 것들을 곰곰이 짚어보는 때가 1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