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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샘 Jan 23. 2019

여행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

화려한 일탈을 꿈꿀 필요 없는 일상을 위하여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에게 덧씌워지는 몇몇 고정관념들이 있다. 그 중 가장 긍정적인 것을 추려보자면 ‘자유’ 와 ‘여행’ 이다.


우리 부부는 실제로 여행은 참 많이 다녔다. 4년간 둘이서만 비행기를 8번 탔으니 말이다. 나 혼자 비행기를 탄 횟수까지 세어보면 하늘에 있었던 시간이 적지는 않은 셈이다.


하지만 언제고 자유로운 여행을 하기 위해 아이를 갖지 않는 거냐라는 질문에 아니오 라고 답한다.  자유로운 일탈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닌 매일 맞이하는 일상의 만족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나는 또래들과 비교하여 꽤 늦은 나이에 해외여행을 시작했다. 스물 아홉의 나이로 남편과 대만에 놀러갔다 온 게 나의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인기 있는 관광지에 들러보고 맛집이라 소문난 곳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경치 좋은 곳에서 예쁜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해외로 나가는 횟수가 적었을 땐 한국에서 벗어났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탈로 느껴졌다. 타지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흥분되는 일이었고 큰 의미였다. 아! 다들 이래서 한 달 치 월급은 일주일 남짓의 여행에 아낌없이 쏟는구나, 다음 달 카드 값 정도는 눈 질끈 감고 넘어갈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스물 아홉살 이후, 비행기를 타는 일은 나에게 점점 더 쉬운 일이 되었다. 집 안에서 티비를 보다가 즐비 하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래서 계획에도 없던 여행을 위해 비행기 표를 예약하기도 했다. 아무 일정을 짜고 가지 않아도 현지에서 블로그 검색만 하면 간편하게 맛집을 찾을 수 있었다. 남들이 짜놓은 일정을 따라다니면 크게 실패할 일도 없었다.


갑자기 홀연히 떠나도 여행을 즐길 수 있으니 일탈하여 자유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여행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져 갔다. 세상이 이렇게 넓은 데 나는 고작 한국에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아등바등 살고 있었다니!


여행을 갔다 와서 그 여행기를 단출하게 기록하거나 사진들을 SNS계정에 올리면 소소한 성취감도 들었다. 나아가 나는 꽤 재미나게 인생을 즐기고 있구나 하는 자기 만족에 빠지기도 했다. 짧은 여행의 기억은 길고 긴 지루한 일상을 버텨내는 힘이었다.     


결혼 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한 우리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모두 한 때의 자유일 뿐 나이 들어서까지 여행을 계속 하며 살 수 없을 거라고. 안 그래도 딩크족에 관한 수많은 편견에 치이다보니 후자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묘한 반감이 들기도 했다. 그 반감은 여행 짐을 한 번 더 단단히 고쳐 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점점 여행에 중독되어 갔다.


아무렴 좋았다. 여행은 언제나 옳은 거라고 많은 이들이 말했고 나 역시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남편과 홍콩 여행엘 가게 되었다. 홍콩은 SNS에서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을 보고 선택한 여행지였다. 명성이 드높은 여행지인데 아직도 나는 가보지 못한 곳이라는 점도 한 몫 했다.


그러나 평소에도 좀처럼 쇼핑을 즐기지 않는 나에게 홍콩이란 지나치게 세련되고 다소 심심한 곳이었다. 건물 숲이 빽빽이 들어선 홍콩 풍경은 살고 있는 서울 도심의 답답함보다 더 하게 느껴졌고 야경은 남산을 오르다가 우연히 내려다 본 서울의 야경만큼의 감흥도 없었다.   그 뒤로 간 방콕도 특별한 감흥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다 극찬하는 매력적인 여행지에서 나만 그 어떤 여행의 의미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여행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더 큰 만족 대신 기시감과 피로감, 그리고 해갈되지 않는 무언가가 마음 속에서 부대꼈다. 여행은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었나? 혼란스러웠다.    


귀국 후 여느 때처럼 우리 부부보다 여행을 더 자주 다니는 부부의 SNS를 구경했다. 여행을 왜 이리 많이 하느냐는 한 사람의 물음에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비행기 표 끊어놓고 지겨운 일상을 하루하루 견디는 거죠. 매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국을 떠나는 날에 하루 더 가까워 졌구나 이런 생각으로 살아요, 저는.”

   

그 순간 여행이 반드시 일상의 변화나 인생의 변곡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어느덧 여행 경험이 적지 않았고 여행에 점차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성에 이끌려 여행을 했고, 재미는 없었다. 게다가 거듭된 여행에 돌아온 일상의 변화는 ‘여행을 갔었다’는 사실 하나였다. 이 사실을 그녀의 대답을 통해 깨닫게 되니 여행을 당분간 쉬고 싶어졌다. 여행하는 대신 일탈을 원하지 않는 일상을 만들고 싶었다.     


다 내려두고 잠깐 훌쩍 떠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진정으로 어려운 일은 매일 맞이하는 내 일상을 바꾸는 일이다.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고 오직 며칠의 여행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현재의 불만을 참거나 여행 후 일상이 그 이전과 별다를 게 없는 삶을 반복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결심을 하고 난 작년 가을, 남편과 여행 대신 매일 자전거 타고 서울을 돌아보기로 약속했다. 서울 공공 자전거 따릉이를 빌려 한강 둔치를 매일 한 바퀴 돌았다. 자전거를 타면서 다양한 장소에서 보는 서울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조용한 장소에서 바라본 서울 야경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이름도 없는 장소에서 보는 서울의 아름다움은 무척이나 사적인 것이었다. 고요한 그 곳에 서서 야경을 바라보면 마치 이 도시와 나 사이에 한 가지 사랑스러운 비밀이 생긴 느낌이었다.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명성이 드높은 곳을 동경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삶과 진정 사랑에 빠지려면 내가 사는 이 곳에서 나만 아는 예쁜 기억과 주관적인 느낌들이 켜켜이 쌓여야 하는 건 아닐까. 오늘이 갑갑한 하루였다면 시선을 멀리 두고 조금만 걸어 나오면 된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바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아주 가까운 곳에 숨통이 탁 트이는 그런 곳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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