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음악 미식기 4 : 터치드 <야경>
https://www.youtube.com/watch?v=bKTTZRnanD0
"여기 봐봐."
조금만 더 넘실거렸다간 신발이 젖을 거리에 쪼그려 앉은 율이 코 앞의 강물에 눈을 못 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한강 10분 거리에 사는 율을 따라 자주 밤산책을 오는데 매번 저렇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강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참을 보낸다.
"그렇지. 그래서 좋아. 호수건, 강이건 뭍에 가까워지면 쓰레기며, 풀이며 잔뜩 떠다니고 물은 또 탁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 이쁘잖아. 근데 이렇게 까만 강을 볼 때는 한없이 까매서 좋아. 알아보긴 힘들지만 어렴풋이 내 얼굴 형체도 보이고"
'또 지랄이네.'
가끔 이상한 포인트에 꽂히는 율이 또 꼴값을 떤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싫다는 의미는 아니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하는 나로서는 율의 눈으로 본 세상을 듣는 게 재미있다.
"그래서 좋은 거면 넌 강을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강을 이루는 것들이 아무것도 안 보여야 좋다면 그냥 어둡고 까만 거울을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것도 엄청 흐릿한."
무릎이 아프지도 않는지, 신발이 젖을까 안절부절 쳐다보는 내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율이 여전히 쪼그려 앉은 채로 이야기했다.
"그거 좋다. 어둡고 까맣고 엄청 큰 거울."
말한 뒤 혼자 생각에 잠긴 율을 그냥 내버려 뒀다. 보통 이 정도의 호흡을 가져간 뒤엔 늘 율이 낯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기억들을 떠올릴 즈음 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있잖아. 나는 지금이 너무 좋아. 요새 힘든 것도 많고, 고민도 많긴 한데 너랑 같이 자주 밤을 보내는 이맘때의 기억이 죽을 때 꼭 생각날 거 같아. 나는 낭만의 뜻은 정확히 모르지만 왜인지 우리가 지금 그 순간에 있는 거 같아."
몇 차례 율이 죽음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예전에는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 두려웠던 죽음이 이제는 자기가 살아갈 방향을 정해주는 거 같다는 율의 말을 아직 온전히 이해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슬프고 힘든 일을 겪을 때보다 늘 기쁘고 행복한 순간에 죽음 이야기를 꺼내던 율이었다는 생각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나는 내가 물방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방개?"
이는 또 무슨 전개인가. 나 몰래 팩소주라도 마시는 건가 싶어 상체를 쑤욱 기울여 율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같은 자세로 강에 비춘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물방개는 아가미가 없대. 원래 육지에 살았는데 육지보다 물이 먹이 구하기가 더 쉬운지 숨을 참고 물에서 헤엄치기 시작했대. 그리고 또... 빛에 쉽게 이끌린대."
"그게 너랑 뭐가 비슷한데?"
"음. 나도 가끔은 혼자 깊은 어둠에 빠져있는 게 막연한 현실을 견뎌내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어. 그래서 숨을 참아가면서까지 깊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 한참을 헤매어. 가끔은 그게 더 편하다는 생각도 해. 근데 있잖아."
율이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건너편 강을 쳐다보며 말했다.
"근데 사실 나도 빛나고 싶어. 정신없이 빛나는 저 사람들이 너무 멋있고 부러워. 나도 그럴 수 있겠지?"
정답이 없는 물음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까. 입 속을 굴러다니는 수많은 말 중 적절한 것 하나 찾지 못해 침음하는 나를 두고 율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까만 강이 좋아. 얼마나 깊은지 알 수도 없고, 얼마나 까만지 그 안에 있는 쓰레기고 더러운 흙탕물이고 보이지도 않아. 그런데 저기 봐봐."
율의 시선이 놓인 강의 건너편에는 자정이 넘었지만 여전히 빛나는 건물들의 그림자가 강에 비쳐 물속을 지탱하고 서 있었다.
"그래도 저렇게 빛나는 모습들을 품을 수 있잖아. 얼마나 맑고 깊은지는 전혀 상관없이 저 건물 속 불빛들을 가득 담고 있잖아."
과연 그랬다. 몇 번이고 봤던 풍경이지만 율의 말을 듣고 보니 저 일렁거리고 뭉개진 불빛들이 한없이 까만 배경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실제 건물들의 불빛보다 더 환하게. 내가 저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저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부자일까?', '저런 건물에서 일하려면 얼마나 좋은 학교를 나왔을까?' 생각하는 동안 율이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와 굉장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강 속에 담긴 불빛들을 바라보다 어느새 내 입 속을 구르던 여러 문장들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내가 옆으로 바짝 붙어 서자 율은 나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죽는 이야기하는 건 언제 고칠래? 대뜸 죽음 이야기하면 무슨 일 있나 걱정된다니까. 네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란 거 이제는 아는데, 평소엔 밝은 얘가 그러니까 여전히 깜짝깜짝 놀라."
율이 머쓱해하며 웃었다.
"근데 나도 죽을 때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 거 같긴 해."
빤히 쳐다보는 율의 눈빛이 느껴져 시선은 강 건너편에 둔 채 말을 이었다.
"그니까. 깊은 어둠에 들어가도 좋은데 너무 자주 그러진 마. 이것 봐. 지금처럼 함께 하니까 평생 기억할 순간도 생기는 거지. 그리고 그 어둠에 빠져있으면 빛이 너를 비추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우리가 강 밖에 있으니까 강에 비친 빛을 눈에 담고, 그 아름다움을 알아채줄 수 있는 거라고."
여전히 율이 쳐다보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조심스레 고개를 내렸다.
역시나 여전히 거기 있던 율의 반짝거리는 눈과 마주쳤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큰소리를 냈다.
"왜, 뭐."
율이 환하게 웃으면 말했다.
"확실히 오늘 밤은 잊을 수 없을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