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선명할 그날의 향기는

내 멋대로 음악 미식기 5 : 백현진<모과>

by newo

모과(2024)

백현진 싱글 <모과> 타이틀곡

https://youtu.be/O7n7DXU56Dw?si=CmJRLP91NpwVUGIh


오랜 시간 비염을 앓아온 탓일까? 나는 냄새를 맡는 것은 물론 직관적으로 향기를 떠올리는 데 미숙하다.

일상에 지장이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어떤 냄새가 진동해도 남들보다 한참 뒤에 알아차리곤 한다.

그때 모과 냄새가 소리 없이 흐르네
그 냄새는 점점 강해지더니 모과 냄새 서서히 진동을 하네

이 노래를 수십 번 들은 뒤에도 모과 향기가 잘 떠오르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겠거니.

분명 언젠가 소리 없이 흐르던 모과 향기를 맡은 적이 있지 않을까. 다만 그게 모과 향기인지 몰랐을 것을.

노래를 들으며 이제 와 '그때 그게 모과 향기였나?' 추측만 할 뿐이다.


세심하게 냄새를 분류하지 못하는 나에게 향기를 떠올리는 일은 어떤 장면을 떠올리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모과 향기라는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릴 적 아버지와 낡은 차 안에서 함께하던 순간들이다.


내 기억이 시작될 즈음 나는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다. 공부를 하던 아버지는 서울에서, 나는 재개발이 되어 이제는 흔적도 찾기 힘든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당시 짧게는 2주에 한번, 길게는 2-3달에 한 번씩 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우리를 보러 고향에 내려오셨다. 몇 년의 공부와 또 몇 년의 연수원 기간을 걸쳐 변호사가 된 아버지는 차부터 구매하셨고, 그때부터는 4시간 남짓한 거리를 차로 다니셨다.


시간이 약간 더 지나 10살이 되던 해 우리는 아버지와 같이 살기 위해 경기도로 이사를 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시골로의 왕래가 잦았고, 나는 곧잘 아버지를 따라 차에 올랐다. 초등학생에게 4시간은 눈 한번 안 붙이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을까. 매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고, 다시 깰 때면 늘 차 속 매캐한 먼지와 정체 모를 투박한 냄새가 나를 감쌌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차 안에 모과 하나쯤은 있었더랬다. 우리 아버지의 낡은 차 뒷자리에도 항상 모과가 놓여있던 기억이 선명하다. 천영방향제라 불리던 모과는 항상 그 수명을 다 한 듯 보였지만, 한참을 더 먼지들과 뒹굴다 새것으로 바뀌곤 했다. 그래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버지의 차 냄새가 모과 향기인지, 낡은 차 속 오만 가지 것들이 섞인 냄새인지는 모를 노릇이다. 뭐였든 간에 정겨웠던 향기였음은 분명하다.


또, 모과 향기는 작년 11월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들과 함께 분홍색 구름과 시원한 바람이 반겨주는 한강을 달리고 다 함께 야외포차에서 술을 마셨던 날. 고민이 많은 20대 청년들이 평소보다 조금 더 마음을 열어둔 채 대화를 나눴던 그날. 그 순간에도 모과 향기는 우리 곁에 있었던 것만 같다.

한순간 우린 다소 과장하면 한순간 정말 모과만 있으면
한순간 완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네 다 필요 없고 모과와 너만 있으면

꽤 오랜 시간 이 노래를 이성 간의 사랑노래라고 생각했다. 잊을 수 없이 환상적이던 어느 밤을 노래하는 담백한 시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지금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생각을 한다. 우리에겐 저마다의 이유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흔히 말하는 그날의 조명, 온도, 습도. 불어오는 바람과 지나가던 인연들. 나눴던 대화와 마주친 눈 속에서 피어났던 따뜻한 감정들. 그것들을 모두 모아 향으로 기억한다면 그게 모과향일지 모른다.

모과향은 나 잘 모르지만 우리 함께 할 그날에 모과향이 날 것만 같아.

모과는 가을의 끝자락 차가운 바람 언저리에서 피어난다. 우리에게서 한여름이 남은 만큼의 시간이 한여름이 끝나고 다시 또 지나면 모과 향이 소리 없이 우리 옆에 흐를 것이다. 아마 그때가 와도 나는 모과 향기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듯하다. 그러나 모과 향기가 내 마음속에 진동하는 순간이 오면 주저 없이 사랑하고 진하게 기억할 것이다.


왜인지 시원하고 또 포근할 것만 같은 모과 향기가 우리 모두의 곁에 조용하고 강하게 흐르기를.

또 우리가 그 순간들을 오랫동안 선명하게 기억하기를.


작가의 이전글무엇이 낭만을 더 빛나게 만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