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성실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꾸준한 사람일까?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마감이 조금씩 가시화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걸 느낀다. 오랜만에 접하는 좋은 느낌. 그동안 미뤄뒀던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림도 못 그리고, 글씨는 그 전부터 손을 놓았고, 리뷰도 밀려서 숙제하듯 겨우겨우 쓴다. (밀려 쓰느라 그새 까먹은 내용을 보충하려 다시 읽는다 허허) 아직 리뷰하지 못한 책 중에는 친구의 책도 있다. 페북에서 들리는 친구의 소식은 몇 년째 너무 바빴다. 일도 많고 괴로운 일도 많(은 것 같)고. 하지만 친구는 계속 글을 썼고, 그래서 읽은 책은 쉽고 친절하고 단단했다. 몇 종류의 글을 쉬지 않고 쓰는 이 친구는, 꾸준했구나.
반 강제로 시작한 브런치를 몇 달을 쉬었다. 가끔 생각이 나긴 했지만 글감도 애매하고, 쓰고 싶은 마음이 차오르기에는 인풋이 너무 없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글감이 없어서 못 쓰는 게 아니라, 글감을 생각하고 쓰려는 노력이 없어서 안 써지는 거 아님? 지금 게으름 피우는 거라고 생각하고 보니, 별로였다. 난 꾸준한 사람인가? 꾸준히 하고, 꾸준히 믿고, 꾸준히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인가?
성실하다는 말을 들어온 만큼, 성실함에 대한 나름의 정의는 있다. 이를테면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는 것’이다. 내 몫의 일은 책임지고, 어떻게든 일이 되게 마침표를 찍는다는 자세다. 그러느라 남의 일을 맡아서 할 때도 있는데, 이건 사실 그리 보람 있지는 않다. 전체적으로야 도움이 되는 자세이지만 몇 마디 칭찬 외에 내게 남는 결실은 별로 없을 때가 있어서다. 그래서 가끔은 좀 바보가 된 것 같다. 마음이 꼬이면 성실하단 말이 칭찬으로 안 들리기도 한다.
반면 꾸준함은, 객관적으로도 믿음이 가는 좋은 특성인 데다 자신에게 결실을 남길 수 있는 것 같다. 책이든 전시든 취향이든 라이프스타일이든. 요컨대 지금 나는 내 손에 남는 것도, 내세울 것도 변변찮아서 허전한 거로군.
그런데 꾸준한 게 정확히 어떤 걸까? 평소에 깊이 생각지 않았던 것에 대해 내 주관으로만 따지려다 보니 조금 막막해졌다. 이럴 때 어떤 이들은 사전을 찾아보던데, 그래서 나도 찾아보았다.
꾸준하다 :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끈기가 있다.
이거, 어려운 거구나. 꾸준한 거. 한결같이 / 부지런하고 / 끈기가 있어야 한다.
부지런... 일찍이 엄마는 물 심부름 시키면 두 번 갔다오기 싫어서 대접에 넘치게 떠오는 날 보며, 바느질할 때 바늘귀 두 번 꿰기 싫어서 팔을 다 뻗을 만큼 길게 실을 잡는 날 보며 ‘게을러서 저런다’고 혀를 차셨다. 너무 맞는 말이라 속으로 깜짝 놀랐던 기억도 ㅋㅋ 그뿐인가, 마흔이 넘은 어느 날,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날 보며 어느 저자는 ‘온몸으로 게으르다’고 했는데, 그게 또 너무 족집게여서 빵 터졌던 기억이.
끈기...는 그래도 좀 낫지 않나 싶은데, 생각해보니 난 항상 단기전으로 승부를 보는 경향이 있는 듯. 둘째아이를 가질 때 몇 시간짜리 산고의 기억보다 몇 주짜리 입덧이 더더더 두려웠다. 짧은 고통은 견뎌도 길게 가는 고난엔 쉽게 밑천을 드러낸다. 생각해보니 한 주제를 붙잡고 오래 공부해본 적도 없구나 ㅠㅠ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단어의 뜻을 찾아보고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문 부분은 ‘한결같이’였다.
난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고, 끈기 있는 사람도 못 된다. 그런데도 도망가거나 뺀질대지 않고 얼추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혹시 한결같기 때문인 걸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든 것. 종종 딴짓을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바빠도 가족들 아침은 챙겨주고, 가겠다고 하면 늦게라도 가고 있겠다고 하면 있는 사람... 음... 써놓고 나니 괜찮네.
이렇기만 하면 다행이지만, 쓰면서 찔리는 구석도 많다. 좋았던 것에 시들하기도 하고, 나이먹는 속도보다 빨리 편협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아이들 진로 걱정을 하다보면 ‘네 뜻대로 해도 돼’라고 했던 내 말을 스스로 먹어버릴까봐 더 걱정된다. 음... 눈길이 오래 머문 건, 내가 한결같아서가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각이었구나.
이렇게 쓰고 나니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사장의 마음> 중 ‘일정한 맛을 하루하루 쌓아가는 일’이라는 꼭지다. 같은 재료라도 산지에 따라, 품종에 따라, 날씨에 따라 상태가 다 다른데 손님들은 항상 한결같은 맛을 요구한다. 또 사람이라 매일매일 컨디션이 다른데 손님들은 종업원에게 한결같은 서비스를 기대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재료를 연구해서 일정한 맛처럼 느끼게끔 해야 하고, 매장운영과 서비스에서 ‘적절함’을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장의 마음>은 부제가 ‘특별한 식당을 만드는 사장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김일도 사장은 세바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하루에 충실하는 것. 거기서부터 비롯된 자존감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잖아요.”
장기적인 동기부여에 회의적인 그가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이것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누군가에게 한 말이 있다.
“난 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
무언가에 많이 억울해서 한 말이었으니 진실은 아닐 것이다 ㅋㅋ 그러나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성실하다고 평가받는 것도 아마 이 덕분일 거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에 충실하는 편이니, 한결같아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다만 호흡이 짧구나. 조금만 길게 바라볼 줄 안다면 나도 꾸준한 사람이 되겠지. 하루하루의 성실함을 엮어 나만의 무언가를 남길 수 있겠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서윤이는 난데없이 농구에 빠져 매일같이 학교 운동장에서 자유투 연습을 했다. 하지만 키도 작고 힘도 딸려 골대 중간 높이까지도 못 가고 떨어지는 바람에 울상이 되곤 했는데.
어느 날, 언제나 그 상태인 서윤이를 두고 수아 교실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2층 창문 너머 허공에 공이 보였다. 닿았구나! 계단을 뛰어내려가니 서윤이가 골을 넣고 있었다. 그날만 100번인가 던진 끝에 넣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서윤이의 슛은 한 번도 그 높이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울면서 100번씩, 며칠이고 될 때까지 반복한 덕분에. 꾸준하게.
”비 오는 날 매장 안에 소리가 울리면
음악의 볼륨을 얼마나 조절하는 게 좋은지,
그날의 온도와 습도 차이나 조금씩 다른 불의 세기로 인해
‘몇 분을 끓인다’라는 매뉴얼이 무색해지는 요리들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일정하게 맞출 수 있는 경험이 쌓이면
‘장인’의 길로 가는 것이다.”
- 김일도, <사장의 마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