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김혼비, 민음사
아아아아아아아, 서점에서 얼핏얼핏 예사롭지 않은 제목을 봤을 때만 해도 이 책이 이렇게 날 웃기고 울릴 줄은 짐작 못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여성적 힘’에 대한 긍정이 우선 좋았던 데다, 난 유독 ‘우아한’이라는 단어에 맥을 못 춘다. 존재가 우아해지려면 갖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 형용사를 갖다 쓰는 것만으로도 주체에 대한 선망이 생기려 하는 이상한 증세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아함과는 매치가 덜 될 것 같은 ‘호쾌함’과의 조합이 ‘여자축구’ 앞에서는 기가 막히게 납득되어서 제목만 보고도 감탄하긴 했다. 그러다 페북에서 누군가가 ‘올해의 책’이라 추천하기에 마음에 잘 담아두었다가 서점에서 ‘어, 너 여기 있었구나?’ 하고 슥 집어왔다.
사실 요 몇 주가 쉽지는 않았다. 어려움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고, 업무의 어려움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겠는데, 요 몇 주 내가 맞닥뜨린 어려움은 한마디로 ‘체력전’, 구체적으로는 잠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겠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아이템들이긴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차분히 들여다보면 풀어낼 수 있는 과제였고, 내가 가장 잘하는 종류의 어려움이기도 했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필 무더위가 겨우 물러나고 보상처럼 가을은 이렇게 좋은데, 하늘이 윈도우 화면처럼 저렇게 청명한데! 침침한 눈으로 고개를 들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툴툴댈 수밖에 없던 기간 동안 이 책이 놀랍도록 큰 여백과 위안을 주었다. 축구를 하겠다면서 왜 축구는 팀스포츠인가 한탄하는 첫 대목에서부터 공감 가면서 입꼬리가 실룩거리더니 며칠 동안 지하철 출퇴근길에 어김없이 입술을 깨물고 어깨로 웃는 일이 반복되었다. 축구테크닉 혹은 용어를 끌어와 온갖 빵빵 터지는 에피소드와 말발을 엮고, 거기에 맨스플레인 비판을 위시해 까칠하고 때로는 숙연해지는 생각을 풀어내는 내공도 실로 놀라워서 조용한 지하철에서 입밖에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예컨대 스텝오버, 일명 헛다리 짚기에 관한 이런 글.
나를 포함, 대부분의 여자 축구 팬들 머릿속 검색창에 ‘축구’를 쳤을 때 뜨는 이미지들은 아마 몇 년도 무슨 경기에서 어떤 선수가 터트린 역전골이라거나, 응원하는 팀이 우승했던 순간, 좋아하는 선수의 안타까운 부상, 이런 것들일 것이다. 반면 남의 축구는 거의 보지 않는 이 ‘축구하는 여자들’ 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른 뼈아픈 실책,우리 팀이 역전승하던 날, 우리 팀 유니폼 같은 것들일 것 같다. 그 속에는 오직 나 자신, 내가 속한 팀만 있다. 어느 프로 축구팀의 어느 유명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오, 생각해보니 이건 이거대로 멋있잖아?
‘팬’으로 축구를 시작한 나로서는 잘 상상이 안 가는 경험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빅 매치와 내 축구 훈련 시간이 겹친다면 고민 끝에 전자를 선택할 것 같은 나로서는 온전히 느껴보지 못할 종류의 밀착감일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축구의 많은 면을 만나려고 하는데, 그녀들은 오직 자신과 직접 맞닿는 면을 통해서만 축구를 만난다. 그 우직한 집중. 나와 같이 축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이렇게 전혀 유별나지도, 신기하지도, 별다른 이유가 있지도 않은 평범한, 하지만 특별한 여자들 사이에 끼어 축구를 한 지 이제 곧 석 달째가 된다. 그동안 인사이드킥을 배웠고, 드리블을 배웠다. 처음으로 헤딩을 했고 강하게 날아오는 코너킥에 겁 없이 머리를 갖다대면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축구’라는 단어 뒤에 오직 나만이 주인공인 이미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축구 바깥에 있던 내가 축구 속으로 조금씩 선을 넘어 스텝오버해 들어가고 있다. 헛다리만은 아니어야 할 텐데.
생각해보면 삶에서 좋다고 말하는 것들 가운데 주인공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만 좋아했던 것이 얼마나 많은가 싶다. 뭐든 시작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입을 여는 데는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나로서는 더 공감할 수밖에 없는 대목. 올해 6주짜리 드로잉 수업을 들으며 왜 이렇게 좋은가 생각하다가, 어릴 때 가고 싶었던 ‘미술학원’에 드디어 갔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뭔가를 직접 해보는, 더 근본적으로는 뭔가를 해보겠다고 시도하는 즐거움. 더욱이 그것이 온갖 선입견과 무지와 맨스플레인으로 겹겹이 접근이 차단된 여자축구 같은 세계라면 “첫 반년을 넘긴 사람들은 평생 축구 못 그만둬요. 이거, 기절해요”라던 누군가의 말이 왠지 납득이 될 것 같다. 계속계속 멋지게 드리블해주기를, 그리고 글로 옮겨주기를. 여전히 게으른 나도 몸과 생각이 호쾌하게 움직이는 우아함을 간간히 간접경험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