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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희 Oct 29. 2018

전자레인지 없는 삶이 가능할까?

<2019 트렌드 노트>로 트렌드 감성 끼얹기


전자레인지 없는 삶을 상상해보았는가? 난 감히 상상도 못한 상태에서 그 사태를 맞았다. 지지난주 주말, 반찬을 데웠던 전자레인지를 ‘탈취’ 기능으로 돌려놓고 서윤이와 평화롭게 저녁을 먹고 있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전원이 꺼졌다. 낮게 터지는 소리가 이렇게 심장 뛰게 할 줄이야. 몇 시간 후 원인을 파악하고자 모종의 조치를 취하고 다시 전원을 연결하는데, 이번엔 내가 쥔 콘센트에서 퍽! 혼비백산해 그 길로 레인지와는 빠이짜이찌엔.

진정한 패닉은 그 뒤에 닥쳤다. 당장 내일 아침 밥은 어떻게 하지? 밥을 하자마자 소분해서 냉동시켜놓는 터라 전자레인지가 없으면 밥 먹는 것도 난망이었다. 서둘러 폰을 켜고 눈에 보이는 가장 무난한 전자레인지를 주문해놓고, 수아에게 돈을 쥐어주고 다음 날 아침용 빵과 우유를 사오게 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토스트 먹이기는 내 맘이 안 좋아서(=옛날사람) 냉동밥은 전기밥솥에 재가열 3회(27분), 반찬은 프라이팬에 일일이 데워서 차려야 했다. 금쪽같은 아침 40분이 그렇게 날아갔다. 전자레인지 있으면 10분이면 끝나는데.

이 사태를 이틀간 겪으며, 얼마전에 편집을 끝낸 <2019 트렌드 노트> 생각이 났다. 집에서 먹는 밥은 더 이상 밥과 국/찌개로 차려진 정성스런 백반 스타일이 아니라 쉽게 데워 그럴듯하게 플레이팅하는 일품요리라고. 엄마의 역할은 찌개를 끓여내는 게 아니라 존슨부대찌개 같은 HMR 제품이 떨어지지 않게 냉동실에 채워놓는 것이라고. (집에서 내 역할이 바로 이것!) HMR 시장이 커지는 것은 1인가구가 늘어서만이 아니라, 다인가구도 1인가구처럼 살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케터가 봐야 할 것은 1인가구 자체가 아니라 '1인용 삶'의 일반화라는 것. 아침만 겨우 비슷한 시간에 먹고 저녁도 각자 먹는 우리집만 보아도 이렇다는 걸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가 책을 만들면서 비로소 느꼈다. 전자레인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아, 요즘 앞서가는 사람들은 전자레인지를 넘어 에어프라이어를 애용한다고 한다. 필립스 게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냈는데 몇 년 새 엄청 저렴한 제품이 많이 나왔다고 @@ (여전히 옛날사람ㅠ)




내게 9월은 이토록 덜 트렌디한 머리에 '트렌드 감성'을 끼얹는 시즌이다. 특히 9월 가을 하늘은 '트렌드 노트 교열 감성'을 일깨운다. 매년 시기에 맞춰 내야 하는 책의 특성상 3년째 9월은 이 책 편집에 대부분 할애하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원고에 묻혀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창밖에 윈도 바탕화면 뺨치게 멋진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곤 한다. 아...


‘트렌드 노트’ 시리즈는 편집자로서 처음 해보는 장기 프로젝트다. 예전에 시리즈를 내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번역서 출간이어서 콘텐츠 자체를 만들어가는 부담은 별로 없었는데, 국내서를 꾸준히 내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다. 흐름을 이어가되 똑같으면 안 되고, 오래가야 하니 질리지 않는 제목으로 어필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예전 편보다 못하면 안 된다. 5~6명의 필진과 소통하고 조율하고 재촉하는 것도 일이라면 일이다.

무엇보다 원고 컨셉이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른다는 게 이 책만의 스릴이다ㅋㅋ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 만큼 ‘이런 책을 만들어봅시다’라는 구상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연초에 필진을 만나서 작년 책의 평가를 하고, 최근에는 어떤 의뢰가 많이 들어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봄에 다음소프트에서 주최하는 <오피니언마이닝워크숍(OMW)>을 듣고 나서, 여름에 최종 구성을 잡고 집필에 들어간다. 전체 원고를 보며 피드백을 주고, 다시 고치고, 데이터를 업데이트한다. 마감이 급한 건 이처럼 철저히 귀납적 프로세스라 그렇다.

담백하게 데이터를 보여주고 해석하는 역량 그 자체에 집중하는 컨셉이다 보니 다른 트렌드책처럼 감각적인 조어를 내놓거나 ‘저기에 기회가 있다’고 세게 찍어주지 않는다. 더욱이 트렌드서 시장에는 이미 강력한 원톱이 있는데, 쏠림이 심한 출판시장에서 이 책이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다행히 책이 나오니 책이 예쁘다는 인사도 듣고, 기다렸다는 듯이 사는 분들도 있다. 좋다는 이야기도 있고 기대 이하라는 리뷰도 있지만 그건 그런 대로 받아들이고 새기면 된다. 가장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이 책 특유의 ‘관찰기’ 컨셉이 어느 정도 힘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책이 잘 나올까 걱정하다가도 원고가 들어와서 읽으면 재미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날것으로 관찰하고 새삼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서다. 하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게 어딨다고. 우리의 라이프스타일 관찰기가 10년쯤 쌓이면 <풍속의 역사> 같은 유쾌한 종합판으로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내 맘대로의 기대도 가져본다. (아, 그러기엔 이 책은 음란함이 1도 없...)


이번엔 밀레니얼 세대가 ‘적성보다 돈’을 중요시한다는 데 충격을 받아 주변 사람들에게도 많이 말했던 것 같다. 마침 채용을 준비할 때 책을 만들어서 이 책의 내용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조심할 것들도 새기고. 예컨대 이런 말.


자아실현은 중요하지만
회사는 자아실현의 장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가에서 ‘시간’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는 내용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긴 시간을 들여야 하기에 책도 이제는 ‘휴식’의 상징이 되었고, 그래서 예뻐야 한다는 것. 요즘 들어 책 디자인이 왜 더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꽤 새롭고 유효한 해석이었다. (그래서 이 책 디자인이 매우 더 신경 쓰였...) 그리고 술. 난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편인데 그동안 주로 소주만 마셨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와인을 마시게 되고, 그다음에는 사케가 좋더니 올해는 날이 싸늘해지면서 브랜디나 위스키 맛이 궁금해지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일하다 잠시 짬을 내 후루룩 마시는 ‘커피 브레이크’는 줄어들고, 시간을 들여 음미하는 ‘티 타임’이 각광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간을 길게 쓰는 것 자체가 ‘나는 여유 있고, 그 시간을 여유에 투여할 수 있는 능력/자본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나도 시간이 귀하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야 하는 술이 더 좋아 보여 관심이 가고, 다른 사람들도 시간이 귀하기 때문에 커피보다 홍차를 더 트렌디하게 여기는 것. 전혀 트렌디하지 않은 나조차 취향이 슬그머니 바뀌고 있고, 나만의 변화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변화하면서 트렌드가 된다.




어느덧 3년째 책을 낸다. 필진 중 한 명인 박현영 저자는 3권의 책을 요약하며

쓸모보다 매력

소유보다 경험

웅변보다 수다

라고 멋지게 정리해주었다. 내년에는 어떤 요약이 더해질지. 이 책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내게는 세상 공부를 하는 과정이다. 부족한 감각을 수혈받는 과외수업 같은 거랄까. 한편으로 경제경영 출판사가 독자들에게 기여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니 내년에도 기대해주시라. 아, 우선 이 책도 많이 읽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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