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며..
6월 필리핀 주재원 발령을 받은 남편이 출국할 때까지만 해도 이별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코로나 상황이 필리핀도, 한국도 여의치 않으니 점점 기약 없어지고 있는 우리의 상봉.
지금 상황에서 필리핀에 가게 되면 남편은 회사 일로 바쁘고 나는 외출도 거의 못 하고 애 둘 데리고 집에만 있어야 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니 사실은 천천히 가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한국에서는 잠깐 나가서 만날 친구도 있고 잠깐씩이나마 마음 편히 맡길 친정도 있고 첫째를 보낼 어린이집도 있었으니...
가족이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의 삶이 내가 피하고 싶었던 필리핀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변하고 있다.
그 사이 남편은 회사-호텔만 매일 반복하며 피폐해져 가더니 얼마 전엔 급성 알러지 증상으로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부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결코 쉽지 않음을 내게 알렸다.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의 잦은 출장으로 떨어져서 지낸 날들이 꽤 있었지만 이렇게 길게는 처음이다. 남편과 나, 우리 둘도 물론 서로가 그립지만 예쁜 아이들을 몇 달째 못 보는 남편이 참 안되었다.
남편의 빈자리는 문득문득 일상 속에서 느껴진다. 가령, 주로 남편의 담당이던 기름 요리나 고기 굽는 것을 해야 할 때, 청소기 먼지통을 비울 때, 귀뚜라미인지 여치인지 모를 곤충이 자꾸 집 안에 나타날 때....
퇴근하고 돌아오면 늘 남편의 아지트 같았던 TV방은 어느새 남편의 흔적은 사라지고 낮에는 신비의 온라인 수업 공부방으로, 저녁에는 나의 글 쓰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TV방에서 거의 매일같이 캔맥주를 마시며 퇴근 후 자신만의 시간을 만끽하던 그가 좀 못마땅했었는데 어느새 나도 육퇴 후 그 방에서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예전 방주인이 하던 짓을 따라 하고 있다.
결혼 직후부터 남편이 주재원이 되어 해외에 가서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로망을 갖고 있었다. 로망의 근거는 해외생활에 대한 막연한 기대 그리고 굳이 내 발로 때려치우기에는 이유가 필요했던 내게 퇴사의 그럴싸한 이유였다.
그 로망이 8년 만에 현실로 이루어졌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하필이면 역사 속 길이길이 기억될 2020년, 해외여행조차 갈 수 없게 된 지금이라니...
회사에서 제공하는 주재원의 복리후생은 예전만큼은 아니더래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지금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 낸 가족과의 기약 없는 이별은 결국 개인의 희생으로 당연하게 요구된다. 현지법인의 특수한 근무 환경으로 인해 한국에서 누리던 워라밸을 포기하기로 결정하는 것도 충분히 힘들었을 남편인데 그 이상의 희생을 요구하는 회사가 너무 야속하기만 하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을 우리 가족이 감당해야 할 터. 내가 상상했던 주재원 라이프는 아닐지언정 속히 필리핀에서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