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하반기에 지역 도서관에서 희곡을 읽고 쓰는 프로그램(희희낭락)에 참여하여 쓴 글입니다.
2024년 10월 18일에 완성하고, 2024년 11월에 프로그램을 마치며 함께 책(비매품-저작권 보호)으로 엮은 글입니다.
티테이블 앞에서 정원과 준희는 노트북을 펼친 채 앉아 있다. 희영은 둘 사이에서 가방을 메고 서 있다.
희영: 오늘도 두 사람은 글 쓰다 늦게 갈 거야? 어쩌나, 퇴근하려는데 발이 안 떨어지네. (장난치듯) 아유, 회사 일 하랴, 희곡 집필하랴, 두 사람 모두 다크 써클이 턱까지 내려앉은 거 좀 봐. 정원 씨는 지난번에 거의 다 쓴 것처럼 말하지 않았어?
정원: (노트북을 덮고) 아, 그게…. 내가 특수 청소일을 주제로 써볼까해서 무심코 AI에게 줄거리를 부탁했어. 너무 그럴듯하게 쓰길래 혹시 기존에 나온 작품이 있나 찾아봤거든. 세상에, 소설도 있고 드라마 시리즈도 진즉에 나온 거 있지. 내용은 제대로 안 봤지만 내가 생각한 거랑 비슷한 흐름을 가질 것 같더라고. 본의 아니게 표절이 될 것 같아서 원점부터 다시 고민 중이야. 준희 씨는 어떻게 돼 가?
준희: 난 MBTI 과몰입 청소년 이야기를 쓰고 있어. 우리 집 청소년은 내가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엄마, 혹시 T야?”라고 하더라고.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거든. “티? 티가 뭐야? 티셔츠의 T? 아니면 녹차할 때의 Tea?”라고 되물었지. 그랬더니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한다나. 검색해보니 MBTI 이야기였어. 나 참, 나 완전 공감의 달인이잖아. 걔네 말로는 대문자 F거든.
희영과 정원이 의아한 듯 준희를 쳐다보며 고개를 흔든다. 양손으로 T를 만들고 입으로는 ‘T’를 말하며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는다. 준희는 희영과 정원에게 투정 부리듯 살짝 눈을 흘긴다.
준희: 내 잔소리에 대응할 논리가 부족하거나 불리하면 “엄마, 혹시 T야?”라고 방어 수단으로 삼길래, MBTI 과몰입 청소년이 좌충우돌하며 생고생하는 이야기를 써서 애한테 보여주려고. 사람을 그렇게 기계적으로 분류하는 게 가당키나 한 거야? 이참에 자기가 맹신하는 16가지 인간 유형을 현실에 대입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도 알려주고, 사람을 폭넓게 이해하며 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 일종의 소심한 복수인 거지. 풉.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는다.)
희영: (미소를 지으며) 오, 준희 씨 방금 살짝 통쾌해하는 표정이 보였어. 희곡을 다 쓰면 나도 꼭 보여줘. 준희 씨의 명석한 계도를 간절히 바라는 MBTI 과몰입자가 (손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여기도 있으니까.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
준희: 내가 희곡 초안을 우리 애한테 보여줬거든. 대충 쓱 보더니, 목적의식이 너무 강하고 사사건건 가르치려 든대. 심지어 도덕 교과서인 줄 알았대. 재미도 감동도 없다고. 다시 보니 엄마가 자기 자식한테 훈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더라고. 나 참, 아주 그냥 내가 혼자 속풀이 한 거야.
희영: MBTI 과몰입자에게 한 소리 하려다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꼴이 되어 버린 거네. (정원을 바라보며) 특수 청소와 관련된 기존의 작품이 있다고 해도 정원 씨만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쓰면 괜찮지 않을까?
정원: 특수 청소 분야는 책 한 권 읽은 게 다여서 그걸 소재 삼아 글을 쓰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시간에 쫓겨가며 누군가의 삶을 피상적으로 그리게 될까봐 조심스럽고 아직은 엄두가 안 나. 기존의 작품을 비껴가며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고.
희영: 그럼 처음에 특수 청소라는 소재에 꽂힌 이유는 뭐야?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있어 보여서?
정원: 느닷없이 한계를 맞닥뜨린 현장. 그곳에서 누군가 애쓰며 살아온 흔적을 마주하는 거잖아. 처음에는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는 삶이 궁금했는데, 지금은 내가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고 있는지에 더 관심이 가. 어릴 때는 하라는 공부만 착실하게 하면 나중에 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회사와 집을 오가는 평범한 직장인이더라. 주말이면 앓는 소리를 하며 침대와 한 몸이 돼서 밀린 잠을 보충하고, 월요일에는 또 멀쩡해져서 출근해. 이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 있지. 20대 때는 ‘1초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엄연히 다른데 나의 연속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라고, 존재는 시시각각 변화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세포의 노화 말고 나는 뭐가 변했을까?
준희: 맞아, 애들은 쑥쑥 잘도 크는데. 말대꾸하는 솜씨도 날이 갈수록 진화하고. 정원 씨가 말하는 평범한 직장인, 우리 애 장래 희망이야. 더 자세히 물어봐도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래.
희영: (웃으며) 장래 희망에 비범한 직장인이라고 쓸 수는 없잖아.
준희: 나 참, 그래도 장래 희망인데 IT나 회계, 이렇게 분야 정도는 나와줘야 하는 거 아냐? 평범한 직장인이라니.
희영: 그러게. 세상에 평범한 직장인, 평범한 주부, 평범한 학생이 있기는 한 걸까? 모두의 삶은 한없이 평범하기도, 한없이 특별하기도 한 것 같아.
준희: 맞아. 밤늦도록 화실에서 그림 그리며 화가를 꿈꿨던 내가 이렇게 서류 더미 속에서 살 줄이야. 오늘 아침에도 용돈을 올려 달라는 애랑 실랑이한 후에 사는 게 왜 이리 궁상맞을까, 생각했어. 그러다 하늘을 봤는데 비행운이 너무 예쁜 거야. 그걸 찍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족 채팅방에 올렸더니 다들 멋있다고 한마디씩 하더라. 마음이 금세 풀어져서 사무실에 새초롬하니 놓인 화분에 물을 주고 잎을 닦아줬지. 이렇게 크고 작은 일들로 나의 이야기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어. 후대 사람들은 특출난 인물만을 기억하겠지만,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소중한 추억들을 아름답게 기억하며 살래. 그게 나의 흔적이고 역사야.
(조명이 꺼진다.)
https://brunch.co.kr/@myryou/9
* 수강생들의 작품은 금천구립도서관에서 [희희낭락]이라는 책으로 소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