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귀족 출신으로 아버지 아리스톤과 어머니 페리크티오네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아테네의 풍습에 따라 음악, 체육, 시작(詩作)에 대한 교육을 받았으며 친척 크리티아스를 통해 소크라테스를 알게 되었다. 이십 대에 겪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종결과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형에 영향을 받아 정치에 환멸을 느껴, 이후 이집트, 퀴레네 등지를 여행하며 스승 소크라테스의 대화편들을 정리, 저술하였다.
특히, 시칠리아 여행 때에 시라쿠사의 독재자 디도 니 시오스 1세의 의형제 디온과 사귀면서 깊은 감화를 주기도 하였다. 또한, 남이탈리아 여행에서는 가타라스의 정치가 아르퀴타스와 친교를 맺고, 그에게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 불멸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조국 아테나로 귀환한 플라톤은 아카데미아 학원을 창설하여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보조적으로 수학, 천문학, 음악이론 등을 가르쳐 인재를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교육기관이었다.
제2차 시칠리아 여행 때에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오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디오니시오스 2세가 즉위하여 친구 디온의 부탁으로 젊은 왕의 교육을 위촉받고, 지배자와 철학자가 일치해야 한다는 그의 저서 「국가」의 철인(哲人)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지만, 젊은 왕의 태만과 반 디온파의 모략으로 실패로 끝나 다시 아테네로 귀환하여 아카데미아에서 연구를 계속, 철학과 사상의 발전을 이룩하였다.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미아에 입학하여 20년간 연구생활을 하였으니, 비록 소크라테스는 죽었지만,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계승된다. 향년 80세(BC 347년) 플라톤도 죽었다.
2.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사실성에 대하여
이 책의 저자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직접 자신의 이름을 두 번 언급했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조국 아테네를 향해 끊임없이 경고를 날리는 반체제 인사였다. 정치가 철학을 재판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자신의 조국 아테네를 신랄하게 비웃다가, 자신의 처지를 당당하게 호소하며, 무지를 준엄하게 꾸짖고, 미래를 경고하는 소크라테스의 일인극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이 쓴 「회상」에 따르면 그리스의 웅변가 리시아스는 재판을 앞둔 소크라테스를 위해 배심원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발언까지 포함된 완벽한 변론을 써줬다고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변론 원고가“철학보다 법학에 가깝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부해 버렸다. 헤르모제네스라는 사람도 소크라테스에게 변론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소크라테스는 “나는 항상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생각하고, 옳은 일을 하며 그른 것을 피하는 데 몰두해왔다. 그것이 최상의 변론준비라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죽은 사후에도 소크라테스를 변호하기 위한 글들이 써졌는데, 그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이자 웅변가인 테오덱테스의 글도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참여하지 않은 크세노폰은, 그 재판의 기록이라는 것이 남의 이야기와 플라톤이 기록한「소크라테스의 변명」에 의지하여 쓴 글이라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사명을 크게 이해하지 못했다.
플라톤은 재판에 참여하여 처음과 끝을 분명히 보고 기록하였으며, 소크라테스의 죽기 전까지의 생애도 정확하게 기억해 낼 만큼 지성과 예리한 이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사실은 플라톤의 방대한 저서로 충분히 설명이 되고 남음이 있다. 물론, 스승이 제자에게 일러주던 지침들이 원칙에 일치하도록 윤색하고 수정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스승에 대한 헌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제자의 치열한 고민이 녹아들었을 것이다. 이 책이 배포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크라테스 죽음 이후 10여 년 안에 쓰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추종자와 비판자들을 포함해 재판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 읽었을 것이다. 만약, 거짓으로 기록하였다면 플라톤은 자신의 목적 ‘스승의 누명을 벗기고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사람들을 고발하는 것’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스승을 욕되게 하는 발언을 꾸미지 않았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들과는 달리 수백 명의 증인들 앞에서 실제로 벌어진 공개적인 사건을 다뤘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이 선명하다. 역사적 사실을 부풀리거나 축소하거나, 플라톤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하였다면 증인들에게서 쏟아지는 비난도 비난이지만, 무엇보다 독배를 받아 드는 소크라테스의 정직에 대한 배신이며, 플라톤 본인의 정직성도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계승이 있기에, 플라톤이 남긴 저작들은 빛나는 철학의 유산이며, 꺼지지 않는, 아니 꺼질 수 없는 인류의 지혜라 할 수 있다.
3. 소크라테스의, 소크라테스에 의한, 소크라테스를 위한 변명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올랐다. 먼저 자신을 고발한 3인, 시인 멜라토스, 정치가 아니토스, 변론가 리콘에게 진중한 눈빛을 교환한 후, 500명의 배심원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웅성거리며 모여든 각양각색의 청중들. 그 속에는 아테네의 시장에서, 거리에서, 신전에서 자신과 직접 대화를 나눈 이들도 보인다.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피했던 사람들, 저까짓 게 뭔데 남을 가르친다고 비웃던 사람들, 자신의 친척들과 친구들, 제자들, 그리고 가족들, 아니 가족들은 오지 않았다. 아내 크산티페와 아들들은 오지 말라고 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는 하루이고, 재판의 결과는 신만 아는 것이고, 설사 사형을 언도받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으니까, 아침에 태양 대신 달이 뜬다 하더라도 소크라테스 자신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신은 그에게 지혜를 주었다. 그는 무지에 시달릴 뿐, 사람에게 시달리지 않았다. 정해 진 시간은 위 항아리 주둥이에서 아래 항아리 주둥이로 물이 옮겨지는 시간, 약 3시간이다. 소크라테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관례대로 라면 통상적으로 법정에서는 ‘배심원 여러분’이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의도적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그는 재판에 선정된 500명의 배심원들은 정의로 은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소크라테스는 다수가 정의가 되는 민주주의 체제를 믿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관습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편의다. 아직 그는 자신보다 지혜로운 자를 만나지 못하였고, 옳은 결정은 표가 아니라 신 앞에 드러난 부끄럼 없는 양심이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하였고 행동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나에게서 여러분의 귀를 만족시켜 줄 미사여구나 조리 있는 말을 듣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철부지처럼 발뺌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 반하기 때문에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침 하고는 여러분은 제가 하는 말이 옳은 지 옳지 않은 지에 관심을 달라고 했다. 오직 진실을 말하는 것이 변론하는 사람의 훌륭한 태도임을 알아달라며, 배심원이 아닌 아테네 시민을 환기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으며 다이몬(새로운 신)이라는 정체모를 신을 믿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발한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변론을 한다. 첫 번째 부류는 ‘소크라테스는 하늘 위의 일을 사색하고, 땅 속의 일을 규명하며 보잘것없는 주장을 강력한 주장으로 만드는 이상한 소피스트(현자)이다.’라고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이라며, 그중에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서 바구니를 타고 공중을 왔다 갔다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소크라테스라는 인물로 그려진 것에 자신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아테네 인들의 편견을 지적했다. 두 번째 부류는 첫 번째 부류의 비방을 근거로 한 멜라토스 외 2인의 고발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지 않는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 고발 내용 또한 헛소문임을 지적하곤 나를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나서서 변론하면 이러한 내용들이 근거 없음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러분, 소란을 일으키지는 마십시오. 델포이 아폴로 신전의 여사제는 저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미 카이레폰은 죽었으므로 이 법정에 있는 그 동생이 여러분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존 콜리어/델포이 여사제, 1891년 作
소크라테스의 열정적인 친구 카이레폰이 신전에 가서 여사제에게 물었다.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습니까. 그러자 여사제는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없다고 했다. 신탁은 애매모호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신탁만이 아니라 그리스 신전의 모든 신탁이 애매모호했다. 수수께끼 같은 신탁이기에 누군가는 축복을 받고 누군가는 저주를 받는다. 축복과 저주의 경계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갈라진다. 곧 그 의지는 선한 이성, 양심의 신탁이다. 소크라테스는 위의 신탁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만족하였을까. 정상적이라면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그는 신탁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신탁을 증명하려고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자를 찾아다녔다. 나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내가 가장 지혜롭다 하였는가. 소크라테스는 따져보고 싶었다. 아테네의 수호신 아폴로에게 신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테네 인들은 고함을 지르고 윽박질렀다. 그들은 분노했다. 신탁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아테네 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 아폴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재판의 패배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대단한 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군. 적어도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군.”
제일 처음 지혜를 찾아간 곳은 정치가 아니토스였다. 소크라테스는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당신은 자신이 지혜로운 자라고 여기고 있지만 사실 당신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알려주었다. 그 결과 그에게 미움을 받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었다. 다른 정치가를 찾아가도 그 역시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몰랐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시인이었다. 시인들은 영감과 소질에 의해서 시를 지어놓고도 자신이 쓴 시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정치인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고, 세 번째로 장인들을 찾아간다. 장인들은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훌륭한 기술로 인해 다른 중대한 일들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고민했다. 신탁을 포기하고 그들처럼 살 것인가. 신탁을 받아들이고 지금처럼 증명해 갈 것인가. 결론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즉 무지의 지(無知의知)를 받아들이며 앞으로도 지혜를 규명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한다.
“인간들이여, 그대들 중에 누구든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지혜가 매우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니라.”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신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신의 뜻을 받아들여 지혜롭지 못한 자에게는 신을 도와 지혜롭지 못함을 지적해주며, 오직 신만이 지혜로우며 인간의 지혜는 보잘것없다는 것을 규명하는 헌신 덕에 오히려 내가 집안을 돌보지 못해 지독하게 가난하게 되었다고 호소한다. 변명 외전(外傳)을 첨가하자면, 때론 가난하게 산다는 게 뿌듯할 때가 있다. 삶을 상대적으로 살아가면 빈곤이 보이고 부유가 보인다. 빈곤할 때는 부유가 부럽고, 부유할 때는 빈곤을 업신여긴다. 삶을 절대적으로 살아가면 밖을 보지 않고 안을 보게 된다. 내면이 가난하면 세상이 조촐해 보이고, 내면이 부유하면 세상이 충만해 보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중에 복중의 복이 가난이다. 역시가난은 먹어도 먹어도 여전히 배 부르지 않는 철학의 밥줄, 궁하면 통한다.
“만약 오직 한 사람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이롭게 해 준다면, 이는 젊은이들에게 크게 복된 일일 것이오. 하지만 멜레토스, 사실은 그대가 젊은이들에게 결코 마음을 써준 일이 없다는 것을 그대는 충분히 증명하였소.”
소크라테스가 시인 멜라토스에게, 그대가 고발한 내용 중에 내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면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대답이 궁색해진 멜라토스는 ‘법률’이라 하였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법률을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재차 물었고, 멜라토스는 배심원 모두라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물었다.
“그럼 방청객은 어떤가?”
“그렇다.”
“평의회 의원들은?”
“그렇다.”
“민의회 의원들도?”
“또한 그렇다.”
“듣고 보니 나만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아테네인 모두가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만든다는 건가?”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럼 말(馬)은 한 사람이 망치는가? 여러 사람이 망치는가? 오히려 말은 한 사람이나 소수의 조련사가 훌륭하게 길들일 수 것 아닌가? 정작 말들과 함께 지내거나 말들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말들을 망쳐놓는 거 아닌가? 다른 동물들도 그렇지 않은가?”
멜라토스가 답변을 안 한 건지, 플라톤이 못 들은 건지, 기록이 없다. 파피루스가 귀한 시대, 기록의 가치가 무용한 내용은 가차 없이 잘라냈지 싶다. 플라톤은 꼼꼼했다.
“그대는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다이몬을 믿으니까, 그리고 이 다이몬이 일종의 신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말이오. 다이몬이 님프에게서 태어났든 다른 누구에게서 태어났든 간에 다이몬이 신의 자식이라면, 도대체 누가 신의 자식들은 믿으면서 신을 믿지 않을 수 있겠소? 마치 말과 당나귀의 새끼인 노새는 믿으면서 말과 당나귀는 믿지 않으려는 경우처럼 이상한 일이 아니겠소.”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멜라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것의 속성을 말하며, 다이몬의 존재를 믿는 것은 신의 속성을 믿는다는 것과 동일하다고 오히려 멜라토스의 모순된 고발을 지적했다. 다이몬은 소크라테스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 즉 양심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양심은 ‘하지 말라’는 수동적 명령을 내렸다. 무엇을 수행하라는 능동적 명령은 내린 적이 없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의지가 양심을 따르면 정의는 나를 따른다.
소크라테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경애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보다는 신께 복종할 것입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 지혜를 사랑하는 일, 여러분께 충고하는 일, 그리고 언제라도 저와 만나는 이들에게 저의 소신을 밝히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죽음이 최고의 선인 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죽음을 최고의 악인 양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자들의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설사 자신이 무죄방면되더라도 여태까지 해 왔던 지혜를 밝히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선언한다. 급기야 나를 무죄방면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며 자신은 절대로 달리 처신하지 않을 거라는 당당함으로 배심원들의 분노를 산다.
“만일 여러분께서 저를 사형에 처하신다면, 여러분께서는 다시 저와 같은 사람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다소 우스운 표현으로 말한다면 저는 신 때문에 이 나라에 붙어있게 된 일종의 등에인 것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 후, 적국 스파르타의 감시 하에 세워진 30인 과두정치는 아테네 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과두정부를 8개월 만에 무너뜨린 민주정부는 아테네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시킬 희생양이 필요했다. 소크라테스는 과두정부에도 민주정부에도 참여하지 않고 오직 철학적 소명에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과두정부에서나 민주정부에서나 환영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서슬 퍼런 과두정부의 체포명령을 거부하여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위기에 몰렸지만, 곧 과두정부가 무너지는 바람에 소크라테스는 무사할 수 있었다. 새로이 수립된 민주정부는 아테네의 위기가 보잘것없는 주장을 강력하게 만드는 소피스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아테네 인들의 분노를 돌렸다. 그 일례로 소크라테스에게도 소피스트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어 추방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고발인은 멜라토스로 되어있지만, 뒤에서 조정하는 자는 민주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정치가 아니토스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정치에 간섭하지 이유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내면의 소리였다고 고백한다.살아남기를 바라면서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 사람은 반드시 사적인 사람으로 지내야지 공적인 사람으로 지내서는 안 된다는 충고와 함께.
“저의 고발인들이 신을 믿는 것 못지않게 저 역시 신을 믿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서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향으로 판결을 내려 주시도록 바랍니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의 동정을 얻기 위해 친척들과 친구들, 또한 가족들을 동원하여 눈물을 흘리며 탄원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불쾌해하지 말아 달라며 정중히 부탁한다. 70세의 노구에 무죄를 얻기 위해 동정을 구하는 것은 자신이나 여러분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아름답지 못한 처신임을 밝힌다. 위의 변론을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1차 변론을 마친다.
“가난한 은인에게, 여러분을 위한 충고의 시간이 필요한 이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런 사람은 프리타네이온에서 식사대접을 받는 것보다 더 적절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1차 판결에서 280:220으로 재판에 진 소크라테스 사형을 구형받았다. 소크라테스 자신의 표 수치가 많음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일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형량 대신 프리타네이온(외국사절, 국가 유공자, 전사자의 유족, 올림피아의 승리자들이 공식적으로 향응을 받는 장소)에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배심원들의 공분을 살뿐, 자신의 무죄증명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소크라테스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우리가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배심원을 설득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는데 자신이 어떤 벌을 받아야 할지 말할 수도 없으며, 어떤 형량을 제안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원고 측에서 사형을 구형하였지만, 실제로는 추방형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추방형에 처해지더라도 다른 나라에서도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결과는 똑같을 것이라고 추방형을 거부한다. 결국 자신의 죗값으로 당당하게 은화 1 므나의 벌금형을 제안하였다가 보다 못한 친구들이 보증을 서서 30 므나의 벌금형을 제안하였다.
“죽음을 피하기보다 비굴함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비굴함은 죽음보다 더 빨리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늙고 행동도 느려서 느린 것에 붙들려 있지만, 저의 고발인들은 영리하고 민첩한 탓에 한결 재빠른 것, 즉 못된 것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 의해 죽음의 판결을 받고 떠납니다만, 저들은 진리에 의해 사악과 불의의 심판을 받기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철학과 정치는 비극적 갈등은 절정에 이르렀다. 심의를 끝낸 배심원 대다수는 사형 찬성표를 던졌다. 아테네 인들은 그의 가차 없는 비판에 노출되기보다는 그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쪽에 중점을 둔 것이다. 360:140, 1차 투표 때의 80표가 움직였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어쩌면 이 일은 이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으며, 또한 제대로 된 것이었다.
“저의 죽음에는 여러분이 저를 죽게 한 처벌보다도 훨씬 더 가혹한 처벌이 곧 여러분에게 닥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저를 사형에 처하고자 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삶을 심문하는 자로부터 벗어나려고 생각하여 결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로 올 것입니다. 여러분을 심문할 사람들이 더 많아질 테니까요.”
유죄판결을 내린 배심원들에게 예언을 한다. 등에와 같은 자들의 책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런 식으로 벗어나는 것은 명예롭지 않은 일이다. 처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쉽고 보기 좋은 방법은 남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최대한 훌륭하게 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반면 무죄에 표를 던진 배심원들에게는 여러분들이야 말로 진실한 재판관이라 부르며 오늘 새벽에 법정에 오는 길에도 신의 소리는 반대를 하지 않았으며 변론을 하던 중에도 자신에게 침묵하였다고 말한다. 즉, 오늘 일어난 나쁜 일은 좋은 일이며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잘못하였다면 익숙한 신의 음성은 분명히 반대를 하였을 것이라는 변명을 잊지 않았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입니다. 저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편이 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될지는 신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담담한 이별 선언을 끝으로 소크라테스는 곧장 감옥에 갇혔다. 변명 이후, 독배를 마시기 한 달 전까지 친구들과 제자들이 탈출을 도모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법의 이름으로, 양심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생의 탈출구를 거부한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친구 아폴로도로스와 크리톤은 그의 임종 시 대성통곡을 하였다. 악처로 알려진 크산티페 또한 슬픔을 가누지 못해 간수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은 소크라테스 최후의 하루가 묘사되어 있다. 영혼에 대하여 심오하게 풀어쓴 이 대화편은 죽는 순간까지도 진지함과 유쾌함을 잃지 않는 그의 대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죽음은 생의 반대에 있는 게 아니라 생의 처음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윤회설이 드러나 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야 할 사람을 위로하는 장면에서는 웃고 있어도 눈물겨운 인물들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作
“오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다네. 기억해 두었다가 갚아 주게.”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약의 신으로 그리스인들은 병이 나으면 닭을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인간적인 병이 나아지는 수술이었다. 이 유언을 마치고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얼굴을 가렸던 천을 벗기자 그의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를 누구보다 따르고 열정을 다하여 사랑하였던 친구, 크리톤은 그의 눈을 감기고 입을 다물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