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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락 Mar 10. 2020

이윤 시집 『무심코 나팔꽃』

서평

우문숙 씨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1. 무심코 모과꽃

 
모르겠습니다. 이윤 시인의 시집을 눈에 넣고 끙끙 거리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습니다. “산문을 좀 쓸 줄 알잖아요.”로 대뜸 나를 인정해주는 듯한 말 한 마디에 욕구가 솟아, 네, 네 하였는지, 아니면 이 글이 실릴 밀양문학회에서 보내준다는 얼음골 사과 한 상자에 입맛이 동하여 승낙을 하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주제로써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시평이거니와, 시인의 각별한 내보임을 ‘보이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안다는’나의 일천한 안목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아는 것도 없기에 낮잠 자다가 천둥소리에 놀라 깬 아이의 동그란 표정처럼 시집의 표지만 이리 보았다, 저리 보았다 하며 눈알만 어지러우니 갑자기 일상의 내 모든 만사도 어지러워집니다. 머엉한 저는. 지금도 머엉합니다.


새는 지절대다 모과꽃 속에 숨었다
당신은 내 속에 들어갔다
산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말려들어  것

-「무심코」전문


내가 아는 이윤 시인은 새처럼 지절댑니다. “요즘 잘 지내시냐.”며 안부를 여쭈었다면 시인의 지절댐에 말려들어가기 십상입니다. 이제 좀 되었다 싶으면 이삭을 좆는 참새처럼 날개소리가 더 분주해집니다. 한참을 듣다보면 소리가 잦아들고 분주한 이면에 담긴 그녀의 침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새는 나무를 떠나 살 수 없고 시인은 언어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는 화엄경의 구절이 있습니다. 시의 꽃은 언어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언어는 버려지는 것입니다. 꽃이 피고 지는 사연들은 시인들의 묵은 관심사이듯이 언어가 버려지고 생기는 사연들은 시인들의 오래되고도 앞으로 있을 숙명입니다. “새는 지절대다 모과꽃 속에 숨었다/당신은 내 속에 들어갔다.는 구절은 언어 속에서 치료 받고 싶은 내밀한 통증이 있습니다. 통증이 뭔지는 모르지만 알 것도 같습니다.

 말려든 꽃잎은 그 형상으로도 제 빛깔을 내듯이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위해/기약 없이 오늘도 미라동을 걷고 있다.”(「부도 직전」)는 시인의 지절댐은 미라동 가는 길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꽃들의 갖가지 사연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눈물이 말려드는 코의 숨소리를 몰라준다고 섭섭해 하지 마세요. 비원(悲願)의 침묵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무심코. 무심하게.

 
2. 곰장어 앞에서

 
몇 해 전 여름, 김해 서상동 시장에서 네 다섯 지인들이 모여서 곰장어를 구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음력 섣달 시모 기일 시누이들 눈빛은 동백꽃이었다. 외출 버튼 하나 켜지면 재래시장 승문 내 집 떡 두 대 주문된다. 제사상이 봉긋봉긋해진다.”(「비망록-건망증세 우문숙 씨」), 살갗의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땀이 주르르 흘려 내릴 것 같은 계절이여도 동백꽃잎처럼 말려 들어가며 꾸물대는 곰장어 불판 앞에서 시인이 갑자기 왈칵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불판 더운 김이 코로 훅 몰아치는 지글지글 난리 통에 난데없이 터뜨려주는 뜨끈한 눈물쯤은 시 쓰는 사람의 일시적 기분이라 여겨주는 예의바른 지인들이 뽑아 준 휴지 몇 장으로 눈가를 훔치고서는“나 요즘 너무 힘들어요, 힘들어.”딱 두 마디였습니다.


그는 내게 늘 불안한 존재이다
으슥한 골목에서 걸어 나오는 불량한 남자처럼
어둠의 냄새 같은 그는
내 안에 큰 무덤을 지었다
가끔 집안을 들쑤시고 식구를 긴장 시킨다
그는 이 집안에서 일방통행이다
그가 낸 길로 아무 말 없이 지나갈 수밖에 없다
오늘도 무덤에 들어간 나는
눈을 꼭 감는다

-「집 무덤」 전문


무덤은 망자의 터이며 생자들이 언젠가 깃들어야할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불량한 남자처럼 어둠의 냄새 같은 그.가 지은 무덤에서 “눈을 꼭 감는” 아내가 생활이 북적되는 시장 통의 허름한 곰장어 집에서 갑자기 울어 버렸습니다. “내일 우리는 어느 골목길 모퉁이서/서러워 울고 있을지 몰라/시루 꽃대 위에 꼭꼭 숨어/한세상 죄지으며 살지도 몰라/그래도 어쩔 수 없지/숨 막히는 순간에도/두 손 꼭 잡고 살고 싶구나.”(「자귀꽃」), 살아있으니까요, 살고 싶으니까요.

죽었다 깨어나신 걸 환영합니다. 여름, 그 밤에 먹던 그 맛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눈물의 이유는 묻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무덤 안으로 함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두 손은 잡아 드리겠습니다. 깃털처럼 가벼운 휴지 몇 장으로 진정되는 울음이라면 숨 막히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쓴 술도 같이 마셔 드리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에서 잠은 사라져/빈집의 부엌을 넘나드는 바람만이/쿨럭, 가래를 내뱉으며 사립문을 흔들고 있었다.”(「빈집」), 새삼 묘지기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안녕하신가요?



3. 기다림에 들다.



저 비는 누구의 맨살 위에 온종일 꽃을 그리다 다시 지우고 잎을 매다는가. 빗방울이 만드는 헐거운 그림 꽃. 잘록해진 길바닥은 쓰러진 화병 같다. 오지 않는 순환버스여. 눈이 시어진다. 노닐다 서성대다, 누가 지금 이 빗속을 걸어오는가.

그녀가 섰던 자리에 밀봉된 그리움이 쏟아진다. 슬픈 목 하나가 툭 떨어진다. 웅덩이에 이는 파문(波紋)을 다 건너야 한다. 오지 않는 순환버스여, 가슴속에 물 주름 가득 안고 기
다린다. 온몸이 귀가 되어 눈이 되어 빗방울처럼, 그녀는 지금 어디로 굴러가시려는가.

-「기다림에 들다」 전문


몇 년 전, 모친을 떠나보내신 시인은 주말마다 밀양행 버스에 몸을 실습니다. 모친의 전생이 순환되어 혼자 남겨지신 부친을 위해 딸은 기꺼이 순환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삼 년 동안 여덟 번/꿈속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허물 수 없는 벽 속에 갇혀서 죽음의 꽃 그림자 하나/새벽이면 나를 멍들게 했다/목구멍에 칼을 내린 무섭던 병.”(「명다리」)에 걸리신 어머니, 어머니. 생육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하는 꿈을 꾼다면 그 꿈은 필시 예지몽이 됩니다. “칼에 맞아 죽을 나의 배반을/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이 붉은 죄(罪 )/깊은 밤 잠결에도 병든 혼(魂 )/두려워라, 꿈속에 누워보는/죽음의 티 눈 하나.”(「명다리」), 천지간의 탯줄을 이어주신 모친에게 저지른  여덟 번의 붉은 죄, 끝끝내 어머니는 새벽같이 무명의 돌다리를 건너 가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오지 않는 순환버스를 기다리게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닥에 닿은 모든 소리엔
나선이 인다는 걸
어제도
오늘도
그 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걸
나는 너는 모르고 살았다

-「파문 1」전문


“살아서 수 없이 보았던 파문을 늦게나마 알게 된 건 오지 않는 순환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어요.”늘 촉촉이 감싸져 있는 눈망울의 시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깨진 물들이 고여서 웅덩이가 되고, 웅덩이의 선들 안에서 다시 파문이 일고, 파문 속에 경계가 일어 웅덩이가 자란다는 것을요. 햇빛이 들면 물은 서서히 말라 버릴 테지만. 비가 또 언제쯤 내려줄까요?”

 

4. 생명의 전화부는 시인의 참된 벗입니다.



2002년 집에 들어온 생명의 전화부 첫 페이지에 방 세 개 보일러에 딸 방 두 개 중 한 개 차단. 거실 피아노 앞 중간까지 화살표. 안방 창 쪽 침대 방문에 아들 책상까지 차단. 부엌은 동그라미 새 겹이다. 시조부 기일 날 찾아든 제비 한 마리도 그려졌다. 글자들이 또박또박 걸어 나오다가 눈에 박히다가 줄장미 핀 오월은 난방 가동 중지라고 붉게

음력 섣달 시모 기일 시누이들 눈빛은 동백꽃이었다. 외출 버튼 하나 켜지면 재래시장 승문 내 집 떡 두 대 주문된다. 제사상이 봉긋봉긋해진다. 붉은 선 그인 날 우문숙 씨 발걸음 발걸음마다 저만큼씩 부풀던 죄, 다녀간 기억들은 한 방향으로만 풀썩거리지 못한다. 버리지 못한 비망록은 수직으로만 자라 더 작아지고

 한 칸 방이 그를 불러들인 날, 발 시린 우문숙 씨 망각 속을 둥둥 떠다닌다. 비눗방울 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 풍진 세상 속으로 밀려간 지금, 오징어처럼 말라버린 시간이 깨어 흐릿한 얼굴로 마주친다. 흐를 대로 흐르다가 비켜서 가는 아아, 그는

-「비망록-건망증세 우문숙 씨」  전문


파편처럼 흩어진 우문숙 씨의 어지러운 기억들을 2002년에 들어 온 생명의 전화부에서 찾았습니다. “방 세 개 보일러에 딸 방 두 개 중 한 개 차단. 거실 피아노 앞 중간까지 화살표. 안방 창 쪽 침대 방문에 아들 책상까지 차단.” 첫 페이지에 적었던 꼼꼼한 보일러의 경계선이 기억의 구획을 가르고 시조부 기일에는 삼짇날에 돌아온다던 제비를 뜬금없이 그려 넣었습니다. 기억은 낡아지지만 기록은 낡아지지 않는 법이지요. 건망증의 오래된 치료법은 습관화된 기록입니다.

“내 갈비뼈는 숭숭 구멍이 났다/ 수십 번 창고를 드나드는 그 여름날의 코끼리 한 마리/유탈된 여자의 몸은 이미 수위를 벗어났다”(「코끼리 두루마리 휴지를 말다」), “막내가 태어나며 만들어 준/갈비뼈 안의 섬 하나, 출렁/매미소리에 발작을 일으킨다.”(「외등(外燈)」), 고단한 우문숙 씨의 숭숭한 마음속을 툭 치고 날아 오른 제비의 날개 짓은 건망증세의 통증을 잊게 만든 경쾌한 시 한 편이 아니었을까요. 다 저녁, 기록이 탑처럼 쌓여가는 한 칸 방, 먼지처럼 풀풀거리는 망각의 신음 속에서 우문숙 씨는 얼마나 많은 제비들을 날려야 했을까요.


…(상략)…
옛날이었던가요?
꿈으로 가는 길 쉽게 밟지 못하고
물것들이 나를 떠나지 않던 날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거칠 것 없이
한 마리 흰 나비로 날아온 그대
내가 살아있는 것이
툭툭 나의 껍질을 두드려 보며
하얗게 부스러진 생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우화-L시인께」전문


흐를 대로 흐르다가 비켜가는 그리움쯤은 맨살로 버텨야 할 시인도 눈물겹지만 아직도 굳은살이 들지 않는 이유는 부스러진 상처에 돋는 살들이 언제나 새살이기 때문입니다.

 
5. 답신



오래된 살구꽃이 또 피었다 피어. 햇살이 아픈 잎들 몸 밖으로 밀어내면 머엉한 저는. 목마른 봄이 되어서야 다시 사랑의 말을 걸지요. 겨우내 숨차게 내려와 맞닿은 꽃들이 마구마구 연분홍 쪽지들을 보네요. 잔잔한 파장으로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담벼락 아래 냉이꽃이 피었네요. 살기 위해 저질렀던 싹이 파란 죄, 황량한 마음에 아픈 향기를 날리는 날 당신은 흰 꽃잎 한 장 그려 주셨네요. 가을 겨울 지나 이제야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요. 어디로 흐르지 못해 막막한 가슴으로 정토사 굽이진 산길에 닿았습니다. 생의 가장 깊은 삼문(三門) 모랫바닥에서 무거운 껍질 벗겨놓고 싶어요. 꽃잎 떨어져 다 마를 때 까지 당신의 결 따라  따라가다가 버들강아지 솜털로 피어나는 봄날에 우리 만나요

-「봄 편지」전문


모과나무는 모과꽃만 기억하고 살구나무는 살구꽃만 기억하듯이 봄 또한 봄만 기억하여 어느새 봄볕입니다. 우문숙 씨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저를 기억하고 이렇게 편지를 띄우신 걸 보면 오래된 건망증에 차도가 있으셨나 봅니다. “이 가을 억새꽃이 틔었습니다/억새는 부드럽게/쓰러지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억새풀 연서」)다고 하신 말씀에 한 겨울 바람 앞에 서있었지만 쓰러지는 방법을 몰라 몸만 더욱 움츠렸답니다. 그러다가 바람은 마주서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야 한다는 알게 되었습니다.

계절의 끝마다 쌓이던 꽃무더기 속에서 흐르다 흐르다가 멈춘 바람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부스러진 생을 이어나가려는 어지러운 반란(叛亂)의 흔적 속에서 꽃은 지는 게 아니라 쓰러진다는 것을, 바람은 부는 게 아니라 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팔꽃들이 불러 낸 수많은 희망이 마른 꽃잎이 되어 풀썩 거리고”(「문 너머 나팔꽃」), “살기 위해 저질렀던 싹이 파란 죄.는 사라져 버린 꽃들의 반란이라 여기겠습니다. 봄날 흘리시는 뜨거운 눈물은 끝끝내 바람이 되지 못하고 꽃이 되어버린 그리움에 대한 묵념으로 여기겠습니다. “집구석구석 목을 놓고 주저앉은 꽃 같은 몸살.”(「명다리」)은 봄날 낮술에 취해 어느 꽃나무 그늘 아래에서 곤히 꾸시는 꿈이라 여기겠습니다. “버들강아지 솜털로 피어나는 봄날.은 아직 멀었는가요? 봄병이 깊으니 낮술이 더욱 맛있겠습니다.


밤은 어김없이
브래지어 끈처럼 연결되어 밀려온다
어찌하여 한 방향만 바라보나
상처만 주는 밤
너는 독이다
핏물 들린 저 꽃에는
날마다 부고장이 꼽힌다!
너덜너덜한 마음이
울음인가 살아 움직이는가
내숭 떠는 자세가
눈물겹지 않은가
푹 삶은 애증인가
내려가고 없는 곳에
왜 여기에 서성이는가?
비루함에 여려
버리지를 못하고
즐거울 것 없는 대화 속에
아직 사랑이 남았는가
밤은 끊임없이 견줄 것이다
틈만 나면 새나가는
부랑아의 눈빛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날이 새면 어떻게 해.
그럴 수
그럴 순 없다

-「끈처럼-詩라는 괴물을 그리며」 전문


詩가 괴물 되면 詩人은 뭐가 되나요? 궁금하다고 물으면 제비 한 마리 그려주실라 나요? 내숭은 떨지 않으셔도 되요. 제가 아는 우문숙 씨는 내숭을 잃어버린 건망증 시인이랍니다. 날이 샌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한 칸 방 흐릿한 망각이 얼굴을 떠올려줄 테지요.

우문숙 씨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가슴이 있어 슬픈 짐승은 사람이고 시인은 슬픔만 있다’는 말 한 마디가 머릿속에 만들어집니다. 울지 마세요. 우문숙 씨. 미라동 가는 길 외등 밑 곰장어 집에서 우리 만납시다. 그 때 우세요. 버들강아지 솜털로 피어나는 봄날이 아니면 또 어떤가요. 어서 만납시다. 생명의 전화부를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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