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새는 지절대다 모과꽃 속에 숨었다
당신은 내 속에 들어갔다
산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말려들어 것
-「무심코」전문
그는 내게 늘 불안한 존재이다
으슥한 골목에서 걸어 나오는 불량한 남자처럼
어둠의 냄새 같은 그는
내 안에 큰 무덤을 지었다
가끔 집안을 들쑤시고 식구를 긴장 시킨다
그는 이 집안에서 일방통행이다
그가 낸 길로 아무 말 없이 지나갈 수밖에 없다
오늘도 무덤에 들어간 나는
눈을 꼭 감는다
-「집 무덤」 전문
저 비는 누구의 맨살 위에 온종일 꽃을 그리다 다시 지우고 잎을 매다는가. 빗방울이 만드는 헐거운 그림 꽃. 잘록해진 길바닥은 쓰러진 화병 같다. 오지 않는 순환버스여. 눈이 시어진다. 노닐다 서성대다, 누가 지금 이 빗속을 걸어오는가.
그녀가 섰던 자리에 밀봉된 그리움이 쏟아진다. 슬픈 목 하나가 툭 떨어진다. 웅덩이에 이는 파문(波紋)을 다 건너야 한다. 오지 않는 순환버스여, 가슴속에 물 주름 가득 안고 기
다린다. 온몸이 귀가 되어 눈이 되어 빗방울처럼, 그녀는 지금 어디로 굴러가시려는가.
-「기다림에 들다」 전문
바닥에 닿은 모든 소리엔
나선이 인다는 걸
어제도
오늘도
그 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걸
나는 너는 모르고 살았다
-「파문 1」전문
2002년 집에 들어온 생명의 전화부 첫 페이지에 방 세 개 보일러에 딸 방 두 개 중 한 개 차단. 거실 피아노 앞 중간까지 화살표. 안방 창 쪽 침대 방문에 아들 책상까지 차단. 부엌은 동그라미 새 겹이다. 시조부 기일 날 찾아든 제비 한 마리도 그려졌다. 글자들이 또박또박 걸어 나오다가 눈에 박히다가 줄장미 핀 오월은 난방 가동 중지라고 붉게
음력 섣달 시모 기일 시누이들 눈빛은 동백꽃이었다. 외출 버튼 하나 켜지면 재래시장 승문 내 집 떡 두 대 주문된다. 제사상이 봉긋봉긋해진다. 붉은 선 그인 날 우문숙 씨 발걸음 발걸음마다 저만큼씩 부풀던 죄, 다녀간 기억들은 한 방향으로만 풀썩거리지 못한다. 버리지 못한 비망록은 수직으로만 자라 더 작아지고
한 칸 방이 그를 불러들인 날, 발 시린 우문숙 씨 망각 속을 둥둥 떠다닌다. 비눗방울 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 풍진 세상 속으로 밀려간 지금, 오징어처럼 말라버린 시간이 깨어 흐릿한 얼굴로 마주친다. 흐를 대로 흐르다가 비켜서 가는 아아, 그는
-「비망록-건망증세 우문숙 씨」 전문
…(상략)…
옛날이었던가요?
꿈으로 가는 길 쉽게 밟지 못하고
물것들이 나를 떠나지 않던 날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거칠 것 없이
한 마리 흰 나비로 날아온 그대
내가 살아있는 것이
툭툭 나의 껍질을 두드려 보며
하얗게 부스러진 생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우화-L시인께」전문
오래된 살구꽃이 또 피었다 피어. 햇살이 아픈 잎들 몸 밖으로 밀어내면 머엉한 저는. 목마른 봄이 되어서야 다시 사랑의 말을 걸지요. 겨우내 숨차게 내려와 맞닿은 꽃들이 마구마구 연분홍 쪽지들을 보네요. 잔잔한 파장으로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담벼락 아래 냉이꽃이 피었네요. 살기 위해 저질렀던 싹이 파란 죄, 황량한 마음에 아픈 향기를 날리는 날 당신은 흰 꽃잎 한 장 그려 주셨네요. 가을 겨울 지나 이제야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요. 어디로 흐르지 못해 막막한 가슴으로 정토사 굽이진 산길에 닿았습니다. 생의 가장 깊은 삼문(三門) 모랫바닥에서 무거운 껍질 벗겨놓고 싶어요. 꽃잎 떨어져 다 마를 때 까지 당신의 결 따라 따라가다가 버들강아지 솜털로 피어나는 봄날에 우리 만나요
-「봄 편지」전문
밤은 어김없이
브래지어 끈처럼 연결되어 밀려온다
어찌하여 한 방향만 바라보나
상처만 주는 밤
너는 독이다
핏물 들린 저 꽃에는
날마다 부고장이 꼽힌다!
너덜너덜한 마음이
울음인가 살아 움직이는가
내숭 떠는 자세가
눈물겹지 않은가
푹 삶은 애증인가
내려가고 없는 곳에
왜 여기에 서성이는가?
비루함에 여려
버리지를 못하고
즐거울 것 없는 대화 속에
아직 사랑이 남았는가
밤은 끊임없이 견줄 것이다
틈만 나면 새나가는
부랑아의 눈빛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날이 새면 어떻게 해.
그럴 수
그럴 순 없다
-「끈처럼-詩라는 괴물을 그리며」 전문